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화산서원(포천)

화산서원(포천)

2025-03-27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가산로 227-40

화산서원은 1631년(인조 9)에 창건된 백사서원(白沙書院)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즉 이겸(李馦)을 비롯한 포천의 유림들이 이항복(李恒福)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가산면 옥금동에 사우를 마련, 그의 호(號)를 따서 백사서원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1635년(인조 13)에 현 위치인 화봉산(花峰山) 아래로 옮겨 세웠다. 현재 화산서원의 외삼문 현판에 ‘인조을해건(仁祖乙亥建)’이라 새겨져있는 데에서 서원의 창건을 1635년으로 보기도 한다. 1659년(효종 10)에는 이곳 지명을 본떠 화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영조는 임진왜란 당시 이항복의 공로에 감격한 나머지 승지를 화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는 한편 후손을 등용하도록 특별히 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며, 이후 지역 유림들이 사우 터에 제단을 세우고 향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에 화산서원복원추진회가 결성되어 사당을 복원하였다. 동, 서재·담장·삼문·홍살문 등도 건립하였다. 서원에서는 음력 9월 12일을 기하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처인성

처인성

2025-07-03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처인성로 673

용인시 남사읍 아곡리에 있다. 형제봉에서 동쪽으로 능선이 이어지며 돌출된 해발 70.9m의 자연 구릉이다. 용인에서 진위로 가는 길목이자 수원-오산-안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처인성의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이며 전체 둘레는 351m다. 작은 규모지만 성 내부가 평탄하여 공간효율성은 좋은 편이다. 성벽은 남서쪽이 높고 북동쪽이 낮은 형태다. 성문은 개거식[開据式]이었으며 북동 성벽에 2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낮은 지점은 판축공법으로 성토하는 방법으로 구축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깊게 박고 목수와 목주 사이에 판목을 설치하고 성질이 다른 흙을 다짐하여 성벽을 조성했다. 그러나 처인성에서는 통일신라 이후의 판축토성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기단석열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기와류와 토기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자기류, 대도와 화살촉등이 출토되었다. 축성법이나 출토유물을 고려하면 처인성은 신라말-고려 초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인성은 몽고군의 2차 침입시 승전지로 잘 알려져 있다. 호원IC에서 차량으로 약 20분 소요된다. 인근에 장흥관광지, 송추유원지, 일영유원지 등이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수원 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 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6-06-19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출처 :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

유엔군 초전기념비

유엔군 초전기념비

2026-03-23

경기도 오산시 경기대로 742 (외삼미동)

1982년 4월 6일에 건립된 신(新)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에서 전사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이다. 초전비는 북한군에 맞서 유엔군이 방어한 최초의 성벽임을 나타내는 세 겹의 높은 탑신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중앙에는 스미스 부대원의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매년 7월 5일을 기하여 죽미령 전투의 의의를 기리고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추념식이 거행된다. 경기도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구(舊)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본래 오산 죽미령 전투 당시 보병 B중대 1개 소대가 배치되었던 1번 국도 건녀편의 99 고지에 위치했으나 2019년 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기단부는 이전하면서 새롭게 제작한 것이다. 1950년 7월 5일 죽미령 전투 이후인 1995년 스미스 부대 장병들이 다시 돌아와 전사한 전우들을 기리며 지역의 유지들과 함께 540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1990년대까지 오산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소위 UN탑이라 불렸다.

파주 윤관장군묘

파주 윤관장군묘

2025-10-23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040~1111)의 무덤이다. 윤관은 고려 예종 때 여진정벌의 공이 컸던 명장·문신이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되었다. 윤관 장군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되었다. 1988년 2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0일과 10월 5일 여충사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고양 서오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양 서오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6-06-16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서오릉(西五陵)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명릉(明陵), 홍릉(弘陵)의 다섯 능을 말한다. 서오릉은 구리 동구릉(東九陵)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실의 왕릉군이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의묘(懿墓, 경릉)가 처음 조성되었고 1470년(성종 1) 예종의 창릉(昌陵)이 왕릉으로서 최초로 조성되었다. 이후 순회세자의 순창원(順昌園),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숙종의 명릉(明陵), 정성왕후의 홍릉( 弘陵)이 차례로 조성되어 조선시대에는 5기의 능과 1기의 원이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과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옮겨져 지금의 서오릉이 되었다.

북한산성

북한산성

2026-03-12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서울시 강북구, 종로구, 은평구 경계의 북한산 정상 능선을 따라 위치하는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 5년(132년)에 북한산성의 명칭으로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년)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졌고, 대서문과 장대지, 우물터, 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고양 벽제관지

고양 벽제관지

2026-03-12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고양 벽제관지는 조선시대의 객사인 벽제관이 위치했던 장소이다. 1476년(성종 7) 11월에 세운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과 조선을 잇는 곳에 위치하여 당시 중국과의 외교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당시의 고양군청이 훼손되면서 1625년(인조 3)에 이곳으로 함께 옮겨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그 원형이 훼손되었고, 조선총독부 2대 총독인 하세가와는 벽제관의 부속 건물인 육각정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했다. 한국전쟁으로 건물과 담장이 소실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그때까지 남아 있는 삼문마저 허물어졌다. 현재는 건물의 기둥을 받치던 돌의 일부만이 남아 옛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지리적인 위치로 인한 전투와 한중외교사의 역사적인 의미가 인정되어 196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남양주 홍릉(고종·명성황후)과 유릉(순종·순명황후·순정황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양주 홍릉(고종·명성황후)과 유릉(순종·순명황후·순정황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6-03-09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홍릉은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1897)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와 조선왕릉의 제도를 결합하였다. 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릉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뿐이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고양 서삼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5-12-1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당동)

서삼릉(西三陵)은 ‘서쪽에 있는 3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조선왕릉 중 서오릉 다음으로 큰 왕릉군이다. 1537년(중종 32)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현 서울 서초구 헌릉과 인릉 서쪽 언덕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1545년(인종 1) 중종의 정릉이 희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자 능의 이름을 희릉과 합쳐 정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 정릉이 현 서울 강남구로 옮겨지면서 다시 희릉이 되었다. 이후 인종의 효릉(孝陵), 소현세자의 소현묘(昭顯墓, 이후 소경원(昭慶園)), 철종의 예릉(睿陵)이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 있던 왕을 비롯한 왕실가족의 태실(胎室)과 왕자·왕녀·후궁의 묘와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이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1945년 광복 후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이 옮겨졌고, 도시화 개발 시기에 왕실 후궁들의 묘와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경내로 옮겨지면서 지금의 서삼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