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30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안성면 원통사로 676
원통사지는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절터다. 1698년에 건립된 원통사 중창비에 따르면,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창건 시기와 사역, 가람 배치 등은 알 수 없다. 비문에는 조선 숙종 때 승려 탄언과 도영, 혜옥, 일학 등이 법당과 종각을 중창하고 동종을 주조하는 등의 대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보다 앞선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덕유산에 원통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16세기 초반에 사찰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통사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의병장인 김동신과 문태서, 신명선, 박춘실 등의 독립 투쟁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1949년에 여수, 순천 사건의 여파로 전소되었으며, 곧바로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해 복구되지 못하였다. 현재는 원통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본래 사찰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에 건립된 원통사 중창비에 창건 및 중창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 무주군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026-07-16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 북리길 40
백산서원은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에 위치한 서원으로,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 하연과 정경부인 성산 이씨를 비롯해 하위국과 하징도·하정도·하형도·하현도를 배향하고 있다. 1821년 백산영당으로 창건되어 문중 자제와 지역 유생들의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이후 백산서원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강당과 사당 등 서원 건축을 통해 조선시대 교육과 제향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2026-07-16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길 119
무풍면 소재지 남쪽에 있는 국도 30호선 무풍터널 인근에 위치한 분양서원은 본래 달성서씨 문중의 서당이었던 풍성당이었다. 그러다 1901년(고종 38)에 분양정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3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후 1973년에 분양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사당에는 조선 전기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으로 유배된 문신 서섭과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곳 깊은 산속으로 이주하여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들을 살린 서효재를 분향하고 있다. 서원 안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의 서원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의 사당 숭모사가 있다. 또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달성서씨 제각 추원재와 3기의 비석이 있다. 분양서원 주변에는 대덕산장터, 민주지산, 덕유산국립공원 등이 있다.
2026-07-16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주읍 내도리
내도리강변유원지는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주읍에 위치한 강변 유원지로, 금강 물줄기가 크게 휘어 흐르는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과거 금강이 돌아나가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금회'라 불렸으며, 사방이 강물로 둘러싸인 지형에서 내도리라는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원지 내에는 옛 선조들이 뱃놀이를 즐겼다고 전해지는 칠암소와 강물에 비친 산세를 감상할 수 있는 칠암산이 있으며, 강변에는 조약돌과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여름철에는 물놀이와 캠핑, 낚시 등을 즐기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으며, 가족 단위 방문객이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야외활동을 즐기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2026-07-21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거창 반구헌은 조선 헌종과 철종 때 영양 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 선생이 기거하던 주택이다. 야옹 선생은 목민관 재임 시 청렴한 인품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재산과 거처가 없자, 당시 안의 현감의 도움으로 반구헌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반구헌이란 이름은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 있다. 반구헌은 대문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는데, 사랑채에 남아 있는 상량문으로 볼 때 1870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구헌이라고 불리는 사랑채는 팔작기와지붕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비교적 큰 건물이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대청이 1칸이며 중앙에 있지 않으며, 방은 3칸이라는 점이다. 측면 1칸에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건물 후면 중앙에 아궁이를 설치하여 방 2개를 한 곳에서 난방하도록 평면을 구성하였다. 구조는 단순 소박하지만,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품격을 풍기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2025-03-19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동호1길 217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는 1810년에 이진악 선생이 지은 주택으로, 조부인 이지유의 호를 따서 동호재라 하였다. 동호마을의 안쪽에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안쪽 높은 곳에 안채 영역을 두고 낮은 곳에 사랑채 영역을 직렬로 배치하였다. 안채 영역은 서향한 안채가 있고, 우측 방앗간 채와 안채의 맞은편에는 곳간채를 튼[ㄷ] 자형으로 배치하고 있고, 안채의 좌측에는 별도의 텃밭을 두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정지, 툇마루가 딸린 안방 마루 2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영역은 큰 사랑채와 중사랑채가 나란하게 남향하고 있으며, 사랑채 맞은편에는 대문채가 배치되어 있다. 큰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중앙에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을 두고 좌우에 마루 1칸과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된 실을 배치해 평면에서 보면 중앙의 온돌방이 돌출된 것처럼 보인다. 좌측 온돌방은 위패를 봉안한 가묘 방이며, 우측 온돌방은 상례 시에 빈소 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2026-07-16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거창 포충사는 조선 후기 무신인 화촌 이술원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1737년에 창건되어 포충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처음에는 거창읍 대동리에 세워졌으나 177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이술원 장군은 1728년 거창현 좌수로 재임하던 중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거창현감 신정모의 명을 받아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정희량에게 붙잡혀 순절하였다. 이후 이조판서와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으며, 충강공의 시호를 받았다. 포충사는 계수천 인근에 자리한 동향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내삼문이 있고 앞쪽에는 경의당과 자전루가 배치되어 있다. 양사당과 고직사도 함께 갖추고 있어 서원과 유사한 건물 배치를 이루고 있다.
2026-07-16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거창 감악사지 승탑은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고려시대 승탑으로,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세운 불교 석조문화유산이다. 원래 감악사 절터에 있었으나 198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승탑은 3단의 받침돌 위에 팔각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받침돌에는 구름과 용, 연꽃무늬 등을 섬세하게 새겼으며 지붕돌의 귀퉁이에도 꽃 장식을 표현하였다. 꼭대기 장식 일부는 없어졌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고려시대 승탑의 조형미와 조각 기법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2026-02-09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적상면 산성로 1050
적상산성 내 안국사 경내 남쪽 축대 아래 있는 호국사비는 적상산성과 관계된 기록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호국사비는 1643년(인조 21) 이조판서 이직이 적상산성을 순찰하게 되었는데, 산성을 수비하고 있던 승병들이 정축란(1637년 호란)으로 모두 도망가고 군량미도 없는지라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고 아울러 사찰 건립을 건의하여 호국사를 창건하면서 세운 비이다. 현재는 글씨가 마모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고, 1898년(고종 35) 간행된 [적성지] 고적조에 비문의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이 비는 전체의 높이가 1.78m이다. 비신은 상단에 [적상산성호국사비 赤裳山城護國寺碑]라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본문을 새겼는데 높이는 1m, 폭 59㎝, 두께 17㎝이다.
2025-01-15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
거창 하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낮은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부에 있는 작은 계곡을 끼고 축성한 포곡식 산성이다. 하성은 거창 성기성과 비슷한 형태의 산성으로 추정되며, 언제 쌓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백제가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처음 쌓았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이일 장군이 왜장 가토의 군사와 치열하게 싸웠으나, 끝내 함락당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남매가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누이동생이 치마폭에 돌을 담아 날랐다 하여, 여성 또는 치마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의 주변 곳곳에는 돌을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있는데, 이것은 성을 쌓다 남은 돌이라고 전한다. 성의 평면 형태는 부정형이며, 원형이 훼손되어 둘레와 높이는 잘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산성이 방치되어 있어 잡목과 잡초가 우거져 있고, 성곽이 심하게 무너져 있어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