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장미의거리

장미의거리

2025-03-26

전라남도 목포시 장미로 40

2000년대 이전 목포는 목포역을 중심으로 한 근대 거리에 상권이 집중되어 있었다. 1990년대 초 하당 지역에 아파트와 상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목포역 주변에서 이곳으로 상권 자체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당 중심부에 자리한 장미의 거리는 새로운 번화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큰 나무와 장미로 조경을 한 길을 만들고 길의 양옆으로 상가가 들어서 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어서 안전하고 여유 있게 다닐 수 있어서 좋다. 특히 장미의 거리 주변으로 영화관과 옷 가게, 카페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구도심이 전통 음식에 강하다면 장미의 거리를 중심으로 한 하당은 젊은 청년들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음식점이 많이 생겨났다.

기적의놀이터 3호

기적의놀이터 3호

2025-03-26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선평리 818-23

순천 기적의 놀이터 3호의 다른 이름은 ‘시가모노’다. 얼핏 들으면 일본에서 빌려온 이름처럼 들리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는 놀이터’의 약자다. 아파트 사이를 흐르는 동천의 천변에 길게 자리한 놀이터로 놀이터에 들어서자마자 킥보드와 밸런스 바이크를 탈 수 있는 곡선형 아스팔트 길이 나온다. 그 주변으로 모래 놀이터가 있고 가장 인기 있는 집라인도 있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그네 놀이터와 체력 단련용 액티비티 시설이 나온다. 유아들이 탈 수 있는 보호대가 있는 그네부터 2인용 그네, 원형 바구니처럼 생긴 다인용 그네도 있다.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어서 완충 역할을 한다. 조금 더 내려가면 아이들이 안전하게 인라인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스케이트장이 나온다. 놀이터 근처에는 강천 수변 공원이 있는데 놀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러 산책하기 좋다.

기적의놀이터 4호

기적의놀이터 4호

2025-01-09

전라남도 순천시 용당동 496

산속 저수지 위쪽에 자리한 순천 기적의 놀이터 4호를 찾아가는 길은 마치 등산로 입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산으로 향해 있다. 기적의 놀이터 4호의 다른 이름은 ‘올라올라’로, 이름에서 놀이터의 콘셉트가 엿보인다. 놀이터의 시설물은 그리 많지 않은데, 큰 미끄럼틀과 그 옆으로 모랫바닥에 거미줄 같은 네트 모양의 시설이 눈에 띈다. 둘 다 올라야 즐길 수 있는 시설이다. 뒤쪽으로는 짧지만 넓은 미끄럼틀도 있다. 눈썰매장의 출발대처럼 여러 명이 동시에 탈 수 있는 놀이 시설과 비슷하다. 놀이 시설물 주변은 자연 녹지인데, 주위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자연학습원도 마련되어 있다. 놀이를 마치고 나올 때는 저수지를 한 바퀴 돌며 산책하기에도 좋다.

한수제

한수제

2025-03-28

전라남도 나주시 경현동

금성산 아래 경현리와 성안을 이어주던 길목인 한수제 일대는 크고 넓적한 바위가 많아 예로부터 나주 시민들이 시원한 금성산 경치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던 놀이터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등산로 입구 우측으로 벚꽃길이 조성되어 있어 봄이면 화려한 벚꽃을 구경을 할 수 있다.

민세 안재홍 선생 생가

민세 안재홍 선생 생가

2025-01-10

경기도 평택시 계루지1길 7 (고덕동)

해방 전후의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정치가인 민세 안재홍 선생이 살던 집이다. 안재홍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 주필로 재직하면서 신간회와 물산장려운동을 이끌었으며, 고대사 연구와 문자보급에 앞장선 민족지사이며 학자였다. 이 집은 전형적인 경기도 지역 전통가옥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특히 누마루가 설치된 사랑채는 고고하고 멋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래 대문간채까지 있었던 것이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 배치를 이루고 사랑채의 동쪽으로 대문채가 위치한다. 20세기 초 생활상의 변화를 반영하여 전통가옥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유리창을 설치하는 등 시대적인 변화를 적절히 가미하고 있다.

신양선착장

신양선착장

2025-03-26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대신로 276

연홍도는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 옆에 있는 섬으로 작지만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곳 연홍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선착장이 바로 신양 선착장이다. 이용자가 많지 않아 화장실이나 대합실 같은 편의시설 없이 방파제 같은 긴 정박시설만 있다. 요금도 배에서 직접 받는다. 연홍도와 신양 선착장 간의 거리는 불과 500m 남짓으로 건너편 선착장에서 배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모습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배는 하루에 일곱 번 왕복 운항을 한다.

목포항

목포항

2025-03-26

전라남도 목포시 해안로 182

목포항은 1897년 10월 개항하여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항내수 면적 51㎢인 무역항이다. 내항-북항으로 나뉘어 있으며 기능별로 전문화되어 있다. 내항은 크게 여객 전용 항과 삼학도의 화물 전용 항으로 북항은 수산물 전용 항으로 개발되었다. 여객 전용 항은 국제여객터미널과 국내여객터미널로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국제여객터미널은 제주도로 취항하는 여객선이 주로 다닌다. 현재 목포항에는 24개의 일반 항로와 11개의 보조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하루 수송 인원은 1만 3천여 명에 달하며 제주도와 홍도, 흑산도 등의 섬 지역으로 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신안의 섬 주민들에게는 식수와 더불어 삶에 필요한 생필품의 운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목포항은 한말 이권 싸움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선박이 몰려드는 거점이 되었으며 신학문과 신문물을 들여오는 선교사들의 통로와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고복수음악관

고복수음악관

2023-10-26

울산광역시 중구 중앙1길 9

울산 중구 중앙 1길 및 새즈믄해거리 일대 150m에 조성된 고복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복고 감성으로 무장한 낡은 건물과 오래된 골목이 말을 걸어온다. 오래된 가정집을 개조하여 꾸며진 고복수 음악관은 1층은 전시공간 2층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타향살이’로 유명한 울산 출신 고복수 선생과 부인 황금심 여사의 생애와 그의 작품, 대표곡도 감상할 수 있게 꾸며놓았다. 고복수 음악관은 개화기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축음기, 피아노, 등의 소품과 인테리어로 꾸며 레트로풍 감성 사진을 찍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울산에서는 한국 가요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복수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한국 대중가요 발전을 위해 매년 고복수가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2층 카페 성남살롱에서는 음료를 즐기며 쉴 수 있다.

구례목재문화체험장

구례목재문화체험장

2025-03-16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 효곡리 366-1

우리 생활 속 목재의 쓰임새, 목재의 생산과정, 목재의 종류 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목재체험관이다. 다양한 전시물과 함께 목재를 활용한 생활 공예품, 놀이기구, 학습도구 등 목재품을 직접 만지고, 느끼고,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이 있고 전문적, 체계적, 정기적인 목공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의 장도 마련되어 있다.

영월암

2025-03-21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2709번길 388 (관고동)

설봉산 기슭 이천시의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하고 산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하나 이를 뒤받침할 만한 실증적 자료가 없어서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영월암에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영월암은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영월암은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는 사세가 꽤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영조의 명으로 「동국여지승람」을 감수한바 있는 신경준(1717∼1781)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 북악사가 보이고 있다. 거의 비슷한 때인 1799년(정조23)에 정조의 명에 따라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1760년(영조36)에 편찬된 전국읍지인 여지도서 (與地圖書) 에도 역시 북악사라고 이름이 보인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영월암(북악사)은 고려 이후 조선 중기까지 그 사세가 알려지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모습을 역사 속에 다시 드러내고 있다. 1774년(영조50)에 영월대사(映月大寺) 낭규(朗奎)가 북악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법호를 따 영월암이라 절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