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5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18
강화 전적지는 갑곶돈대, 고려궁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으로 5개소이며 강화도는 지리적 특성상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는 첫 번째 관문으로서 수많은 전투가 일어났던 전적지이다. 몽고와의 항쟁을 비롯하여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 및 정묘호란을 피했던 곳으로, 개화기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었으며,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서울 방위를 위한 중요한 국방 요지이며, 1977년 복원 및 보수작업을 마무리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2026-03-12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청소년야영장 내 위치한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능이다. 강종의 맏아들로 1212년(강종 1)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이고, 비는 제21대 희종의 딸인 안혜태후이다. 46년간 재위하였지만, 정치적 실권은 무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북방 민족의 침입도 잦아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1231년 몽골이 침략하자 다음 해 강화로 천도하여 항쟁했으며 16년간에 걸쳐 강화에서 을 판각하였다. 1259년(고종 46)에 태자 ‘후일의 원종’가 몽골에 가서 강화의 뜻을 비쳤고 항쟁하던 성곽도 헐어버렸다. 같은 해 6월 고종이 사망하자 강화에 묻었고 그것이 홍릉이 되었다. 본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되어있으며, 맨 아래에 정자각, 2단에 사람 형상의 돌 조각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돼 있다. 원형의 봉분은 직경이 4m로 작은 편이다. 지금은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만 남았다. 1988년 재실이 신축, 복원되었다.
2026-09-22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길이 710cm, 높이 260cm, 넓이 550cm의 커다란 돌을 사용했으며, 형태는 북방식 고인돌로서 고대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000년 11월 29일 호주 케인즈 제24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강화도 고인돌 유적은 고인돌의 제작 기겁과 선사시대의 다양한 무덤 형태 등에 대해 알 수 있는 공간으로 아이와 함께 역사 여행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2025-03-14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 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2026-03-12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향교길 58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인 강화향교는 지방의 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한 교육기관이다. 고려 1127년 현재 내가면 고천리에 창건되었다. 1232년 강화읍 갑곶리로 옮겼다가 이후 서도면 볼음도로 옮겼다. 1624년 당시 강화유수였던 심열이 송악산 기슭으로 또다시 향교를 옮겼다. 1629년 명륜당을 세워 학교로 승격시켜 학궁이라 칭했다. 1673년 유수 민시중이 남산 근처로 옮겼다가 1731년 유수 유척기가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강화향교의 건축물은 대성전, 동무와 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으로 구성돼 있다. 명륜당은 향교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강당이다.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현재는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배향 기능만 남아있다.
2026-06-2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15번길 89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의 7, 8부 능선에 쌓은 테뫼식[山頂式] 성으로 흙을 이용해서 쌓은 산성이다. 덕양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로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 북, 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고 있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 토기와 회청색 경질토기 등의 조각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 수지문[手指文]이 새겨진 기왓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 시대까지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의병과 승명을 포함한 2천3백 명과 함께 왜군 3만여 명을 크게 물리쳤다. 왜군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충장공 권율 도원수의 행주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매년 제례행사와 그 밖의 여러 가지 문화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권율 도원수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충장사에서 행해지는 이 제례에는 장군의 영혼을 불러들이기 위해 향을 피우고 제례를 지낸다. 선조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2026-04-08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 (문학동)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며, 지방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인천향교가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중반에 수리하였다고 전한다. 지금 남아있는 주요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1976년에 대성전·명륜당·삼문 등을 고쳤다. 현재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이 남아있다. 뒤쪽에는 제사공간을 이루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을 경계로 앞쪽에는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 후묘의 배치형식을 볼 수 있다. 향교에서는 인성 및 예절교육 등 전통문화를 가르치는 교육의 기능은 물론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사의 기능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2025-07-17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묘소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유적지 내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마재마을이라 불리며 경기옛길 평해3길로 지정되어 정약용 유적지, 실학박물관, 다산생태공원, 수종사 등이 한강길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정약용선생묘는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되어 있다. 묘소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설치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신유사옥으로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되었으나 19년 만에 풀려났다. 유배 기간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완성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결국 고향인 능내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약용유적지에는 묘소 외에도 생가인 여유당,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이 있어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매년 열리는 정약용문화제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념인물인 다산 선생의 실사구시 사상과 인문정신을 계승하는 남양주시의 대표 문화제로 1986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남양주 방문 시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여행 코스를 계획할 수 있다.
2025-03-24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이로
남이장군 묘는 화성시 비봉면에서 2.5km 떨어진 한양 조씨의 선산 내에 있으며 남이장군과 부인이 함께 있는 쌍분묘로 1973년 7월 10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남이(1441∼1468)는 본관은 의령으로, 태종의 외손이며 좌의정 권람의 사위이다. 1457년(세조 3) 1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의 난(1467)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여진의 건주위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을 무찔러 이름을 날렸고,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1468년에 28세때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를 꾀한다하여 죄명을 쓰고 능지처참형을 당하였다. 역적으로 몰린 남이장군의 후손들이 시신이 훼손되는 일이 없게 남이섬과 전국 각지에 남이장군 이름의 가묘를 만들었고, 고증을 거쳐 이 곳이 남이장군의 실제 묘소로 확인되어 이곳에서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고 봉분은 2기이며, 봉분 아랫부분은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조선 초기의 예술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석인상은 경기 지역 능묘 문화의 특성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하다.
2025-10-23
경기도 김포시 북변중로25번길 38 (북변동)
김포향교는 1127년에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향교는 원래 김포 여자종합고등학교가 있는 산기슭에 있었으나 왕의 능을 그곳에 모시게 되면서 김포읍 걸포리로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건물은 196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세워져 있다. 그 외에도 재실(齋室)과 출입구인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人(사람 인)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이며, 대성전과 달리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八(여덟 팔)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명륜당 내부는 일반적으로 좌우 1칸씩 방으로 꾸미는 것과 달리 김포향교에서는 전체를 1칸으로 구성하였다. 대성전과 명륜당만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