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5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안터1길 36
지석묘(고인돌)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 중 하나로, 주검을 땅 위에 두는 탁자식(북방식)과 땅 아래에 두는 바둑판식(남방식), 그리고 주검을 지하에 묻고 그 위에 덮개돌만을 덮는 개석식의 세 종류가 있다. 옥천지석묘는 탁자식 고인돌로, 4면에 널돌을 세우고 그 위로 길고 평평한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었는데, 현재는 앞뒷면 널돌은 사라지고 양쪽면에만 널돌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갈돌대, 돌쩌귀, 돌칼, 돌화살촉, 그물추, 구멍쪼으개, 여성을 나타낸 얼굴조각, 토기 등이다. 주로 식생활에 관련된 유물이 많아 묻힌 사람은 여자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2025-03-18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원당골1길 188
안국사지는 당진시내에서 서남쪽으로 10.5km 떨어진 정미면 수당리 원당굴 은봉산 중턱에 있는 절터이다. 안국사지 석불에서 서남쪽으로 500m쯤 채석장을 끼고 올라가면 1,000여 평의 터가 남아있다. 안국사터의 앞면은 돌로 축대를 쌓았고 터 안에는 장대석이 이리저이 나뒹굴고 주춧돌 3개가 보인다. 이 주춧돌들은 자연석이 아니라 양각 형태로 잘 다듬어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빈 터 한쪽에 작은 옹달샘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부속건물이 있었음직한 터에 기와조각이 흩어져 남아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해미현조에 보면 "안국산에 안국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창건연대는 문헌에 나타나 있지않아 분명치 않으나 백제 말엽 창건되어 고려 시대에 번창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폐찰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석불, 석탑, 석축, 배바위돌 하수구 등이 현존하여 사찰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 터의 동북쪽으로 500여m쯤 아래쪽에 보물 석불입상과 보물 석탑이 서 있고 그 뒤로 배바위 매향암각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2026-06-19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제천 덕주산성은 월악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그 외곽을 여러 겹으로 둘러쌓은 석축산성이다. 월악산 남쪽 자락 일대는 남과 북을 잇는 도로의 길목으로 예로부터 전략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신라 경순왕의 첫째 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머물면서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이라 하여 덕주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덕주골로 들어가서 처음 만나는 성벽이 외성이고 하덕주사에서 마애불을 향해 올라가다가 도중에 보이는 성벽이 내성이다.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골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난 전설이 있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했다고 전한다. 이 산성은 고려 때 몽고의 침입과 조선조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해 수차례 파괴되어 현재는 홍문관만 남아있다. 누각이 없어진 석문에는 담쟁이넝쿨이 자라 있다. 제천시에서는 문화재 복원 사업으로 성곽 2,560m, 초루 3동을 복원하였으며 현재는 안팎으로 5겹의 성벽이 남아 있는데 그 축조 연대가 각각 달라 성을 축조하는 방법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
2025-11-03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411-38
진천 길상사는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유신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고,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이 되었다. 그 뒤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장군이 태어난 태령산 아래 장군의 사당에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관리가 소홀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년) 백곡면에 죽계’를 세워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고종 1년(1864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는데 1926년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 있는 자리에 길상사를 다시 세웠고, 1975년 정비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장우성이 그린 그의 초상화와 흥무전, 흥무대왕신성비 등이 있다.
2026-07-03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로 280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475~538)를 지킨 왕성이다.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공주산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으로도 불렀다. 조선 선조·인조 때 지금과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공산성에서 시대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백제문화제 기간에는 공산성 앞에서 금강신관공원까지 부교로 건널 수 있다. 금서루에서는 백제왕국의 위풍당당함을 ‘웅진성수문병근무교대식’으로 볼 수 있고, 금강신관공원에서는 밤풍경이 아름다운 공산성 감상이 가능하다. (출처 : 공주 문화관광 홈페이지)
2025-07-09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송강로 523
정송강사는 송강 정철선생(1536∼1593)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지방기념물이다. 선생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현종 6년(1665)에 우암 송시열이 지금의 묘소로 자리를 정하고 그의 후손 정양이 이장하여 사우를 창건하였으나 규모가 작아 1979년에 전면 신축 정화하였다. 사당은 목조 19평 맞배지붕이고 유물전시관은 시멘트 32평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경내에는 송강 묘소와 신도비가 있으며 송강 선생의 은배, 옥배 그리고 연행 일기 65일 분과 친필 편지 등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정송강사 왼쪽에 있는 마른 억새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오르다 보면 송강의 묘소가 나온다.
2025-03-17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수의1길 75-8
진천군에 위치한 금성대군 사당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1426∼1457)을 봉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조선 영조 16년(1740)에 창건하고, 1974년에 삼문과 담장을 보수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금성대군은세종의 여섯째 왕자로 이름은 이 유,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세조 2년(1456)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류되어 순흥으로 유배되었는데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 고변을 당하여 이듬해 사사되었다.
2025-07-09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생음대로 594
무극전적 국민관광지는 6.25 전쟁 때에 국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음성지구 전투인 감우재 전투의 격전장이 되었던 곳에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국민 관광지 조성계획으로 1986년 6월 30일 18,499㎡의 부지에 무극전적 국민관광지를 조성하였다. 6·25 전쟁 최초승전을 기리기 위해 전승비, 전승탑 등이 있으며, 조국광복과 수호를 위하여 순국하신 애국선열과 반공전몰 용사를 봉양하기 위한 충혼탑,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월남전에 참가하여 국위를 선양한 대한해외참전 기념탑, 새천년 밀레니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문명과 생활을 사랑하는 후손에게 전해 주는 가교가 되어 선조들의 삶과 전통을 후세의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음성군타임캡슐 2000이 자리 잡고 있다.
2025-12-30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이며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며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이었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하였는데, 동학운동 때 수백 명의 동학군이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년)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2024-10-04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
화양동 남쪽에 있는 낙영산과 성암부락 동쪽에 있는 도명산 중턱을 둘러싼 성터로 도명산성이라고도 한다.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했으며 전체둘레 5.1km, 외성을 합한 석축만도 3.7km에 달하는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서쪽으로 난 계곡에 수문과 서문을 내고, 서문의 바깥 좌우의 기슭에 외성을 축조하여 계곡 방면을 공제하고 있으며 성의 동문은 화양동계곡 쪽에, 남문은 사담계곡 쪽에 시설되었다. 성벽의 축조는 자연석으로 쐐기돌을 많이 사용하여 쌓고, 내면은 계단모양으로 쌓아 고려 후기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축조 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의 요소마다 네모꼴의 망대를 만들고 있으며, 자연암반을 둥글게 파내어 기둥을 세운 흔적이 많다. 동남쪽의 성벽 일부는 커다란 석재를 열 지어 놓은 특이한 축성법을 보인다. 지금은 무너져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중심성과 바깥성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안의 정상 부근 바위에 도명산 마애불이 음각되어 있고 문터, 건물터 8곳, 성 안팎으로 물을 통과시키는 장치인 수문터, 우물터 4곳이 남아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또 건물터를 중심으로 도기조각, 자기 조각, 돌로 만든 절구, 숫돌이 발견되었는데, 유물들의 성격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쌓은 성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