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1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경주 낭산의 정상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릉(재위 632∼647)은 646년경에 조성되었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원형 봉토분이며,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에 2단 보호석을 쌓은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 의식에 의해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재위 16년간 첨성대와 분황사,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으며,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과 함께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도리천은 불교 설화의 수미산 밑을 이야기하는데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 신하들이 묻자, 낭산 기슭이라 대답하였고, 이 기슭에서 장사를 지냈다. 이후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사천왕이란 도리천의 호불신으로 선덕여왕의 무덤은 결국 도리천에 있는 셈이 되어 비로소 신하들이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수 선덕여왕릉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에 신문왕릉, 효공왕릉, 신무왕릉, 효소왕릉 등이 있다.
2026-05-11
경상북도 경주시 능남길 10-4
경주 무열왕릉은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의 능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中代)의 첫 진골(眞骨) 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 있다.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 되어 있어 이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2025-08-07
경상북도 경주시 봉황로 15 (노서동)
신라의 금관이 출토되어 붙은 이름이다. 1921년 9월 가옥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것인데, 이미 파괴된 고분인 데다 정식으로 발굴조사된 것이 아니어서 묘의 구조나 유물의 정확한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출토물은 금관을 비롯하여 장신구·무구(武具)·용기 등이며, 특히 구슬 종류만 총 3만 개가 넘게 나왔다. 금관총의 원형은 지름이 50m, 높이 13m 정도이고, 신라 때만 있었던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속에 덧널[木槨]을 마련하여 옻칠한 널 [木棺]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구조와 불교의 영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 신라 이전인 지증왕(智證王) 전후의 6세기에 만들어진 왕릉으로 추정된다.
2025-12-11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 서쪽에 있는 포석정은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였으나,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 때로 본다. 규모는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 길이가 약 10m이다. 포석정은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에서 유래하였다. 353년 중국의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속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술 3잔을 마시게 하였다. 유상곡수를 즐기는 주위는 높고 험한 산이 있고, 숲과 대나무숲이 있으며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한다. 이에 신라에서도 험한 남산 봉우리를 뒤로 하고 죽림과 송림이 울창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계곡에 포석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는 남산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고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곳에 와서 남산 신의 춤을 따라 해 어무상심무를 만들었다 한다. 또한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나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 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되어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입구 포석정지 방문자센터에서는 포석정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모형과 영상물을 상영한다.
2026-08-13
경상북도 경주시 첨성로 140-25
첨성대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 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도라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 자 모양으로 맞물린 기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를 이루는 돌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진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첨성대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형상화했다. 첨성대를 만든 365개 내외의 돌은 1년의 날수를 상징하고, 27단의 돌단은 첨성대를 지은 27대 선덕여왕을, 꼭대기 정자석까지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 것은 음력 한 달의 날수를 상징한다. 관측자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쪽 12단과 아래쪽 12단은 1년 12달, 24 절기를 표시한다. 하늘의 움직임을 계산해 농사 시기를 정하고,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도 첨성대가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과거의 특별한 인연으로 묶인 보겸과 지아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던 첨성대는 경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유적으로서 관람가치가 뛰어난 것은 물론 계절마다 다양한 꽃과 식물이 피어나 나들이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2026-06-18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 (내일동)
밀양 남천강 옆 아동산에 위치한 영남루는 국보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동서 5간, 남북 4간의 팔작지붕에다 좌우로 2개의 딸린 누각을 거느린 이 거대한 2층 누각은 신라의 5대 명사 중의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건물인 소루였으나, 영남사가 폐사되고 난 이후 고려 공민왕 때 그전부터 있던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하여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84년에 밀양부사 이인재가 다시 세운 것이다. 부속건물로 능파각, 침류각, 사주문, 일주문, 천진궁이 있으며 영남루 누각에는 역사의 흐름을 조명해 볼 수 있는 당대 명필가들의 작품들이 편액으로 즐비하게 남아 있고 뜰에 깔린 석화 또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게 한다. 영남루의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 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 시켰는데 웅장한 기풍으로 인해 당당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밀양강에 임한 절벽 위에 위치하여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그 경관이 수려하여,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16경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그 16경 중에 하나로 선정되었다.
2026-05-29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 (내일동)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조선시대 사당으로 밀양 남천강 옆의 영남루 바로 아래 대나무숲 속에 있다. 이 비각은 죽음으로써 처녀의 정절을 지킨 아랑을 기리는 것으로 조선 명종 때 세워진 것이라 한다. 1965년 종래의 건물이 낡아 지역민들과 출향 인사들의 성금과 당국의 보조로 현재의 아랑각을 중건하였다. 사당은 맞배지붕의 3칸 건물이며 삼문으로 이루어진 정문은 정순문이라고 편액 하였다. 사당 안에는 이당 김은호가 그린 아랑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아랑은 조선 명종 때 밀양부사의 딸 윤동옥을 가리키며 재기 있고 자색이 뛰어난 규수로 전해진다. 18세 때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을 갔다가 통인 주기에게 정조를 강요당하자 죽음으로 정절을 지켰다. 이후 밀양 사람들은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정절을 기리기 위해 영남루 아래 아랑의 시신이 묻혔던 곳에 열녀사라는 사당을 지었다. 매년 음력 4월 16일이면 소복한 처녀들이 제관이 되어 제등을 밝히고 그의 정숙한 넋을 기리는 아랑제가 열리고 있다.
2025-10-27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2025-08-19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2길 44-7
경주시 충효동 옥녀봉 능선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묘로 674년(문무왕 14) 축조되었다. 김유신은 신라의 장군이자 재상으로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문무왕은 비단 1,000필, 벼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 100명을 보내어 장사를 지내게 하며 비를 세워 공적을 새겨두고 수묘하는 백성을 배정해 주는 등 최고의 예를 베풀었다. 후에 흥덕왕대에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봉분은 30m에 달하는 큰 원형분으로 둘레에는 24장의 호석과 돌난간을 둘렀고 호석과 돌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그 무덤의 양식 또한 왕릉이나 다름없는 규모와 형태이다. 호석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대개의 경우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으나 김유신 묘의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몸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며 무장을 하지 않아 매우 온화해 보인다. 경주왕릉에는 몇 군데 지신상조각이 있으나 조각의 우수함이나 상의 거대함으로는 김유신묘를 따를 수 없다. 면적 1만 4143㎡로 경주시에서 관리하며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묘역에는 김유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금산재의 비각이 있다.
2026-09-29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칠곡 가산산성은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쌓은 조선시대 석성이다. 내성은 1640년, 외성은 1700년 그리고 중성은 1741년 각각 완성하였고 칠곡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성 안에 객사, 인화관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보루, 장대 등이 설치된 점으로 보아 행정적 목적보다는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칠곡 가산바위는 가산산성 서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가암 또는 개산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면이 깎아지듯이 우뚝 솟아 있는 바위로, 바위 정상부에는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사방이 트여 있어 바위 위에 오르면 대구광역시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바위의 정상면에는 깊이 파인 구멍이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이 땅의 기운을 잡으려고 바위 위 구멍 안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으나, 조선시대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칠곡 가산산성 등산 코스는 가산봉과 가산바위를 오르는 코스이다. 팔공산 가산산성지구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동문과 가산봉을 지나 중문을 거쳐 가산바위에 다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