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월송정

월송정

2025-10-23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로 517

사적지 관동팔경의 하나인 월송정은 고려시대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 때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으나, 낡고 무너져서 유적만 남았던 곳을 1933년 향인 황만영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일제 말기 월송 주둔 해군이 적기 내습의 목표가 된다 하여 철거하였다. 1964년 4월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가 철근콘크리트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을 살필 길 없어 1979년에 헐어 버리고, 1980년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본떠서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월송정은 신라의 영랑, 술랑, 남속, 안양이라는 네 화랑이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을 즐겼다 해서 월송정이라고도 하고, 월국에서 송묘를 가져다 심었다 하여 월송이라고도 한다. 정자 주변에는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면 금방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월송정의 소나무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솟아오르는 일출 광경은 널리 알려져서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인근에 있는 망양정과 함께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몇 안 되는 일출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망양정

망양정

2026-08-24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은 그 위치가 고려 때에는 기성면 망양리 해변언덕에 세워져 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 채신보가 망양정이 오래되고 낡았다 하여 망양리 현종산 기슭으로 옮겼다 한다. 그 후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1518년(중종 13)에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게 부탁하여 중수하였고, 1860년(철종 11)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더불어 현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屯山洞)으로 이건 하였다 한다. 망양정은 성류굴 앞으로 흘러내리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그 경치가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가는 곳이라 하여 숙종이 『관동제일루』라는 친필의 편액을 하사했다. 숙종과 정조가 친히 지은 어제시와 정추(鄭樞)의 망양정시,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초, 채수(蔡壽])의 망양정기 등의 글이 전해오고 있다.

경주 문무대왕릉

경주 문무대왕릉

2026-08-27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동해 봉길리 앞바다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해수면 위로 동서 35m, 남북 36m, 높이 5.3m 정도 노출되어 있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 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 통치를 위한 5소경 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자신이 용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며,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유골을 동해에 묻어 달라고 한 유언을 따라 장사한 것이다.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라 하며, 바닷속 왕릉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바위섬에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 모양의 인공 수로를 만든 다음, 가운데 작은 못처럼 파서 항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길이 3.7m, 폭 2.06m, 두께 0.9m의 넓적한 거북 모양의 돌을 물속 2m 깊이에 놓아 그 밑에 유골을 모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 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촉석루

촉석루

2025-11-14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남강(南江)가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향시(鄕試:初試)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사용되었다. 6.25 때 불탄 것을 시민들의 힘을 모아 진주 고적 보존회를 만들어 1960년에 복원하였는데 건물은 팔작지붕에 다락루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누각 밑의 돌기둥은 창원의 촉석산에서 채석하였고 목재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가져왔으며 루에는 4개의 현판과 시인 묵객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매년 가을 진주성에서는 ‘진주남강유등축제’가 개최되어 독특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경주 석굴암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 석굴암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6-07-07

경상북도 경주시 석굴로 238 (진현동)

석굴암(국보)은 신라 경덕왕 10년에 당시의 재상인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석굴암의 구조는 방형과 원형, 직선과 곡선, 평면과 구면이 조화를 이루며, 특히 벽면을 따라 조각된 38구의 불상과 보살상은 어느 것 하나 걸작이 아닌 것이 없고 전체적인 조화를 통해 고도의 철학성과 과학적인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중앙에는 백색 화강암으로 된 본존불인 여래좌상이 동해를 굽어보고 있으며, 여래좌상의 정면은 문무왕 수중릉인 봉길리 앞 대왕암을 향하고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되고 있다. 석굴암에서 바라보는 수평선 너머의 붉은 해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장관을 이룬다. 석굴암에서 해돋이를 감상한 뒤에는 1998년에 개설된 석장로를 따라 토함산에서 동해안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감포와 양북 앞바다에서 청정해역의 신선한 회를 맛보고,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을 함께 둘러보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된다.

의기사와 의암

의기사와 의암

2026-03-17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의기사는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 패한 뒤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 및 진주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있다. 의암은 진주성 촉석루 암벽 아래 남강 물속에 있는 바위로서 임진왜란 전에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이라고 불리었으며, 임진왜란 때 논개가 이 바위에서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후 의리를 세운 바위라 하여 의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바위의 크기는 가로 3.65m, 세로 3.3m이며, 오랜 시일을 두고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움직여 암벽 쪽으로 다가섰다가, 때로는 강 쪽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며 진주 8경 중 제2경에 속하는 관광지이다.

천마총(대릉원)

천마총(대릉원)

2025-11-17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경주 대릉원 안에 위치한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 이전 신라의 고분이다. 1973년에 발굴되었으며,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무덤은 높이 12.7m, 지름 50m 규모로 봉토 안에는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으며 적석층 내부에는 길이 6.5m, 너비 4.2m, 높이 2.1m의 나무로 만든 방이 있고 그 중앙에 목관을 두어 시신을 안치했다. 천마총은 대릉원 고분군 가운데 유일하게 일반에 공개된 고분으로 인근의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바로 발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출토된 유물은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의 관식, 금허리띠, 금동신발 등 피장자가 착용한 장신구류를 포함해 총 11,526점에 달한다. 이 중 대표 유물인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형태로 앞면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세 줄 장식이 솟아 있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두 줄 장식이 있다. 또한 나뭇가지 장식에는 생명력을 상징하듯 돋아나는 싹 모양과 곡옥 장식들이 달려 있으며,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천마총의 이름은 이 무덤에서 발견된 ‘천마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로 우리나라 고분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회화작품이며, 신라 회화의 대표작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재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경주 오릉

경주 오릉

2026-09-28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7-1

경주시 탑동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왕비 1명의 무덤이라 나와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 승하 후 7일 만에 몸이 다섯 개로 흩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 몸의 다섯 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오릉 동편에는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덕전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알영부인의 탄생과 관련한 알영정이 보존되어 있다.

옥산서원(경주)

옥산서원(경주)

2026-06-19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경주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러한 회재 이언적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다음 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공간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식의 배치 체계를 따르고 있다. 구인당은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무변루, 학생들의 기숙사로 동재인 민구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사액서원 중 하나로 그 덕분에 선생의 저서는 물론,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다양한 문집 등의 귀중한 서적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하동 고소성

2025-09-02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신라 때 돌로 쌓은 산성으로 능선을 따라 5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성의 내력에 대해서는 하동군읍지가 유일한 자료이다. 기록과 성의 위치 및 규모로 보아 신라가 군사적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이나, 최근에는 5세기 전반 고구려 광개토왕이 신라를 거쳐 왜군을 토벌하면서 남하했을 때 쌓은 고구려 계통의 성으로 보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쌓았다. 산성의 성벽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나, 서남쪽 섬진강을 굽어보는 구간은 허물어져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지리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중턱의 고지에 있으며, 그 단면이 사다리형인데, 가공한 장방형 석재를 써서 견고하게 쌓고, 남북에 두 개의 성문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