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영광군 백수읍 성지로 1218-54
원불교는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영촌마을에서 태어난 소태산 박중빈이 창시한 종교로 세계에 500여 개의 교당과 100만 신도가 있다고 한다. 원불교에서 일컫는 성지는 소태산 대종사가 탄생하여 개교한 영광의 영산성지인 이곳과, 교화의 장을 연 익산성지(익산시 신룡동), 교리를 초안하고 교강을 발표한 변산성지 등이 있다. 소태산대종사가 탄생하여 성장하고 구도과정 끝에 마침내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크게 깨친 후, 구인 제자들과 함께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성사 등 교단의 초석을 다진 곳으로,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일대를 말한다. 원불교의 개법성지인 이곳에는 대종사의 생가, 기도터인 삼밭재, 마당바위, 대각을 이룬 노루목,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이룬 정관평 방언답, 방언공사 제명바위, 구인기도봉, 영산원, 대각전, 영모전, 영산선학대학교, 범현동 이 씨 재각 등이 있어 성지 순례차 전국의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440
왕인박사는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의 선진문화를 전파하여 일본의 문화 시조로 숭상받는 인물이다. 왕인박사유적지는 구림마을의 동쪽 문필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왕인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의 자취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왕인묘, 내삼문, 외삼문, 문산재, 양사재, 전시관, 왕인상, 책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왕인묘에는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왕인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곳으로 월출산 서쪽 산 중턱에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책굴은 왕인이 학문을 수련할 때 쓰던 석굴이다. 전시관에는 탄생도, 수학도, 도일도, 학문전수도 등이 걸려 있다. 이 외에도 왕인박사가 마셨다고 전해오고 있는 성천이 있으며 탄생지 옆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성기동 서쪽에 있는 돌정고개는 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동료, 문하생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정든 고향을 뒤돌아 보았다 하여 돌정고개가 되었다 한다. 왕인박사의 전설이 서려 있는 성기동은 1986년 6월 23일 성기동 국민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봄이 되면 왕인박사 유적지는 벚꽃 나들이 명소로 유명하다.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금성관길 8
이 건물은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 매월 1일과 15일에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고 외국 사신이나 정부 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초창은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로 재직한 이 유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각지붕의 320.66m²(97평) 건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 건물로 사용해 오면서 원형이 파괴되어 1976년에서 1977년 사이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2025-03-05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요천로 1447 (천거동)
춘향사당은 춘향의 임 향한 일편단심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건립된 사당으로, 광한루의 동쪽,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 속에 있다. 사당의 중앙에는 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이 있고, 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으며,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참배객이 늘고 있다. 최초 영정은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려 기증하고, 1939년 가을에 이당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나란히 봉안하였으나 6.25중에 훼손되어 1961년 기증받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이 현재까지 봉안되고 있다. 춘향사당은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해마다 5월 5일에는 춘향제가 성대히 열린다.
2026-06-08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향교길 43
남원향교는 1407년 전국 향교설치령에 따라 1410년(태종 10)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남원부신치제용재기(南原府新置濟用財記)」에 보면 고려 말인 1359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410년에 남원부 서쪽인 대곡산 기슭에 창건된 후 1428년 덕음봉 아래로 이전, 1443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에 명륜당을 재건하였지만 화재에 의해 소실되어 1876년에 중건하였다. 1894년에는 대성전을 중건하였으며, 남원동헌 문루였던 환월루를 1935년 향교로 이전하면서 ‘진강루’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남원향교는 대성전을 북쪽에 두고, 명륜당을 남쪽에 배치한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이고 있으며, 진강루는 명륜당과 연결되어 있는 건축물로 남원향교 전체의 출입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외삼문, 내삼문, 사마재, 강학당, 예구청, 수인당, 전사청 등의 부속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남원향교는 전라도에서 전주향교, 나주향교와 함께 규모가 크고 인지도가 높으며, 건축물들의 구조와 형식이 독특한 건축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2026-05-15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만복사길 7 (왕정동)
남원 만복사지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이다.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 발굴조사 시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았으며 청자와 백자, 많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5층석탑(보물), 불상좌대(보물), 당간지주(보물), 석불입상(보물) 등이 현재 절터 내에 남아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2026-08-13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수읍 논개사당길 41
의암사는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주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장수삼절로 알려진 논개는 조선 중기, 진주병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끝까지 저항하던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기생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 논개는 성의 함락과 군관민의 죽음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바위 위로 유혹해 껴안은 채 남강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를 훗날 의암이라 하였다. 지금 사당을 의암사라 부르는 연유이다. 경내에는 생장향수명비각, 기념관, 외삼문, 내삼문, 충의문, 영정각이 차례로 있다. 장수군에서는 의암 주논개가 태어난 매년 음력 9월 3일을 장수군민의 날로 정하고 논개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대제를 지내고 있다.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반남면 고분로 747
영산강 하구가 둑에 막히면서 자연산 장어가 거의 잡히지 않지만, 영산강의 열두 구비 중 아홉 번째 구비라 하여 이름 붙여진 나주의 구진포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이어서 예로부터 장어가 유명하다. 특히 구진포 장어는 미꾸라지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맛이 뛰어나다. 현재는 구진포 삼거리를 중심으로 7~8곳의 장어집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 1940년대에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이곳만의 조리법으로 조리하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맛을 낸다. 구진포는 영산강 물길이 구부러지는 곳에 있는 나루라 해서 ‘구부나루’라 불렸고 예전에는 영산강의 물이 앙암바위를 돌아 이곳에서 모여 다시 굽이친다 해서 회진포라고 불렀다. 차량 이동 약 10분, 4.2㎞ 거리에 영산강 황포돛배 나루터와 나주 홍어거리가 있다. 나주 반남 고분군은 삼국시대의 고분이다.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 고분군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대형 옹관과 함께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등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옹관고분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달리 영산강 유역에만 분포하던 독특한 묘제이다. 초기의 옹관고분은 지면을 파고 옹을 반쯤 안치한 후 그 위에 낮은 분구를 쌓았으나 후대에는 분구를 쌓은 후 정상부에 흙을 되파고 옹관을 안치하였고 분구의 규모도 커진다. 이처럼 옹관을 묘제로 사용하는 형식은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며, 한국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묘제의 일부로 사용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처럼 대형 전용 옹관을 사용한 예는 없으며 영산강 유역 토착세력에 의해 완성된 묘제로 이해되고 있다. 대안리 일대에는 12기가 분포하는데 제9호 분은 대안리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이며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촌리 일대에는 9기가 분포하는데 일제강점기에 9호 분 등 고분 일부가 발굴되었으며 이때 금동관(국보)을 비롯한 금동신발, 금반지,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구리팔찌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9년 신촌리 9호 분을 재발굴 조사한 결과, 고분 정상부를 두르며 장식한 원통형 토기 32개가 출토되었다. 원통형 토기는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하니와’라는 유물과 같은 성격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교류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덕산리 일대에는 14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으며 중심 축조 연대는 신촌리, 대안리와 유사한 5세기 중엽~후반 경으로 판단된다. 반남 고분군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10호 분은 석실분으로 6세기 중엽 이후 백제 세력이 진출하면서 토착세력의 옹관묘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인근의 국립나주박물관을 함께 방문하는 것도 좋다.
2025-07-09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수읍 향교길 31-14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숙종 12년(1686) 때의 일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께 제사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건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앞면 가운데에는 여닫이문을 달았다. 오른쪽과 왼쪽 칸에도 같은 형식의 문짝 1개씩을 달았는데 그 옆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의 창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구조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러한 장식은 조선 중기 이후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장수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적은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이다.
2026-09-16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담양군 용면 도림리
담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에 있는 금성산성은 호남의 3대 산성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석성이다.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였으며, 임진왜란 후 성곽을 개수하고 내성을 구축하였다. 효종 4년에 성첩을 중수하면서 견고한 병영 기지로 규모를 갖추었다. 성안에는 곡식 1만 6천 섬이 들어갈 수 있는 군량미 창고가 있었고 객사, 보국사 등 10여 동의 관아와 군사 시설이 있었으나 동학농민운동 때 불타 없어졌다. 동서남북문의 터가 있는데 이 4개소의 통로 외에는 절벽 등으로 통행할 수 없어, 요새로는 더할 데 없이 좋은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지리적인 특성으로 임진왜란 때는 남원성과 함께 의병의 거점이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치열한 싸움터가 되었다. 정상에 오르면 담양읍을 비롯한 평야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무등산과 추월산이 보이고 아래로는 담양호가 펼쳐져 있다. 담양호는 금성산성에서 차량 이동으로 11분 거리에 있으며, 소류지 근처에 담양금성오토캠핑장이 있어 야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