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1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길 37 (계동)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전통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주거지역이다. 그리고 많은 사적들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어 도심 속의 거리 박물관이라 불리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북촌(North Village)’이라고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가회동과 송현동, 안국동, 그리고 삼청동이 있다. 사간동과 계동, 소격동 그리고 재동에는 역사의 흔적이 동네이름으로 남아 수백 년을 지켜온 곳이기도 하다. 북촌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양반층 주거지로서 1920년대까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는데, 1930년대에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장되고, 도시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형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주택경영회사들이 북촌의 대형 필지와 임야를 매입하여, 그 자리에 중소 규모의 한옥들을 집단적으로 건설하였는데, 현재 한옥들이 밀집되어 있는 가회동 11번지와 31번지, 삼청동 35번지, 계동 135번지의 한옥주거지들이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한 북촌의 한옥은 전통적인 한옥이 갖고 있는 유형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적인 도시조직에 적응하여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진화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북촌 지역이 모두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던 1960년대와 달리, 1990년대 이후 급속하게 들어선 다세대가구 주택 때문에 많은 수의 한옥이 사라졌지만, 일부지역은 양호한 한옥들이 군집을 이룬 채 많이 남아 있다.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 준다. 북촌 지역을 걷다 보면 이어진 처마선의 아름다운만큼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북촌한옥마을이 지속가능한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침묵관광을 하도록 주의를 요한다. ※ 침묵관광이란 외부 관광객들의 관광지 방문으로 인해 주민들의 생활권과 환경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큰 소리로 떠들지 않고 조용히 여행하는 관광형태를 말한다. ※ 북촌마을 방문 시 지켜야 할 ‘에티켓’ - 단체관광객 방문 시 반드시 가이드 동행 - 관광버스 불법주차 금지 - 무단 침입, 무단 촬영, 무단 투기, 노상방뇨, 소음 금지 - 마을 방문시간 준수
2026-08-20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04 (동숭동)
젊음의 열기가 가득한 대학로는 대한민국의 예술, 공연, 자유 등을 대표하는 문화 집결지라 할 수 있다. 대학로가 젊은이들에게 이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것은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법대가 자리한 시절부터이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주변 대학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다른 어떤 장소와도 비교 불가한 대학로만의 개성을 만들어갔다. 1975년 서울대학교는 관악산 아래로 캠퍼스를 이전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아름드리 마로니에 나무가 있어 ‘마로니에공원’이라 이름 붙은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후 젊은이들과 방문자들을 위한 연극, 뮤지컬 등의 크고 작은 문화시설들이 하나 둘 들어서게 되면서 비로소 오늘날의 대학로가 완성되었다. 서울시는 1985년 5월 대학로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인사동에 이어 두 번째로 2004년에 ‘문화지구’에 지정했다. 문화지구는 문화자원이 밀집된 장소를 선별해 시장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보호하고 관리할 필요성을 느껴 선정한다. 대학로의 공연 예술을 활성화시키고 방문객을 늘면서도 상업 관련 시설이 주가 되는 것은 지양하고 소극장 및 문화시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앞으로도 대학로만의 순수한 낭만과 예술이 번창하는 곳이기를, 대학로의 더욱 빛나는 내일을 소망한다.
2026-03-13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앞길은 종로구 팔판동 162번지(삼청동길)에서 청와대 앞을 거쳐 궁정동 98-6번지(효자로)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이 청와대 앞을 지나는 데서 그 이름을 유래했다. 1988년 3월 31일 처음 청와대 앞길로 이름 붙여졌으며, 경복궁 북쪽 담장길과 북악산 기슭 청와대 사이를 횡단하여 한때 시민의 통행이 금지되기도 했다. 청와대 앞길로 들어서면 좌우로 울창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나무 그늘과 아름다운 꽃밭을 감상하면서 산책을 할 수 있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맞은편에는 청와대가 있고, 청와대 앞길이 끝나는 곳에는 청와대의 기자회견장인 춘추문이 있다. 춘추문에서 경복궁 정문인 건춘문에 이르는 삼청동길에는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가 늘어서 있다.
2026-03-12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424 (방이동)
88서울올림픽의 숨결이 살아 있는 올림픽공원은 88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운영·관리하는 시민들의 체육, 문화, 여가의 공간이다. 지난 1984년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대회 개최를 위해 1986년 완공되었다. 공원 중심부에 몽촌토성이 복원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6개의 경기장이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서울올림픽의 감동과 한성백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도심 속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곳곳에 산재해 있는 올림픽기념 조형물과 야외 조각작품들, 고대 백제의 유적지인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드넓은 잔디와 몽촌해자, 그리고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 잘 정돈된 평화의 광장을 비롯한 크고 작은 야외광장 등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열리는 KSPO DOME(올림픽체조경기장), 티켓링크 라이브 아레나(핸드볼경기장), 올림픽홀, 우리금융아트홀, 뮤즈라이브 등 문화공간을 갖추고 있다. 특히, 43만 평의 넓은 공간에 자연녹지와 올림픽시설물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 매우 편리한 도심 속에 자리하고 있다. 각종 경기, 대형 콘서트, 이벤트뿐만 아니라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CF, 영화등 야외촬영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2026-03-09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5군데 있었는데 그중에서 2군데가 안산(무악산) 정상에 있었다. 평안북도 강계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경기도 내륙, 고양 해포나루, 무악동봉, 남산 훈도방으로 연결되는 봉수를 남산에 최종적으로 연락하는 곳이다. 무악산에 있는 이 봉수대터는 조선시대 봉수체제가 확립되었던 1438년(세종 24)에 무악산 동·서에 만든 봉수대 가운데 동쪽 봉수대터이다. 터만 남아있던 것을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94년에 복원하였다.
2025-09-02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 (내곡동)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태종, 오른쪽(동쪽)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원경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태종은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2년 후 1422년(세종 4)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원경왕후의 능 서쪽에 능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능침 봉분은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금강령) 등을 새겼다. 봉분 주변으로는 문석인, 무석인, 석마, 정중석,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특히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 등은 다른 왕릉에 비해 두 배 더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따른 것이다. 능침 아래의 신도비각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세운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에 원래 신도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재위 1800~1834)와 순원황후 김씨(1789~1857)의 능이다. 인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앞에서 봤을 때 왼쪽에 순조, 오른쪽에 순원황후를 모셨다. 1834년(순조 34)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파주 교하의 장릉(인조) 근처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1856년(철종 6)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긴 인릉 자리에는 원래 세종의 옛 영릉이 있던 곳이었는데, 인릉을 공사하면서 주변 땅에 묻혀 있던 세종의 옛 영릉 석물과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옛 희릉 석물을 다시 꺼내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다시 사용한 석물은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이며, 일부 석양과 망주석, 석마는 새로 제작하였다. 이는 인릉을 옮긴 후 편찬한 『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인릉을 옮긴 후 다음 해 순원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릉에 합장되었다. 능침 아래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조선시대에 세운 표석(순조대왕, 순원왕후)이고, 2비는 대한제국 때 세운 표석(순조숙황제, 순원숙황후)이다.
2025-11-27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6 (합정동)
절두산은 원래 누에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잠두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1866년 2월 프랑스군함이 천주교탄압을 문제 삼아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과 서강까지 진입하였다. 이에 격분한 대원군은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잠두봉에서 목을 베어 참수케 한다. 그 뒤로 머리를 잘랐다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병인박해(18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7년 10월 순교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현재 절두산성지 내에는 한국 천주교회 관련 사료와 유물·유품전시관, 28위의 성인유해를 모신 유해실, 순례성당, 순교자 교육관을 비롯하여, 야외 전시관이 있다. 절두산 순교 성지는 생명을 바쳐 믿음을 증거 한 한국 천주교회 신앙 선조들의 순교정신이 살아 숨 쉬는 뜻깊은 성지이다.
2025-08-05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홍릉로 90
영휘원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이고, 숭인원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의 첫째 아들 이진 원손의 무덤이다. 엄씨의 위패는 현재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모셔져 있다.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는 엄진삼의 장녀로 8살에 입궐하여 명성황후의 시위 상궁이 되었다가, 1897년 영친왕을 낳아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1903년 황귀비로 책봉되고 경선궁에 살았다. 황귀비는 여성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양정학교가 재정난을 겪자 땅 200만 평과 내탕금을 기증하는 등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경술국치 후 1911년 덕수궁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신주는 덕안궁에 모셨고 이후 덕안궁은 육상궁 경내로 옮겨졌다. 의민황태자의 첫째 아들 이진 원손(1921~1922)은 영친왕와 황태자비 이씨의 첫째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듬해에 영친왕 내외와 함께 잠시 귀국하였으나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덕수궁 석조전에서 급사하였다. 순종황제가 원손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을 내려, 현재의 자리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영휘원은 조선시대의 원소 제도에 맞게 조성하여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세웠고 원침에는 호석을 둘렀다. 숭인원은 영휘원과 비슷하게 조성하였으나 원침에 호석과 석양을 생략하고 석물과 봉분의 크기도 다른 원에 비해 작게 조성하였다.
2026-05-20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산공원길 105
남산서울타워는 효율적인 방송전파 송수신과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 관광 전망시설의 기능을 겸비한 국내 최초의 종합전파탑으로 방송문화와 관광산업의 미래를 위해 건립되었다. 세계 유명한 종합 탑들이 그 나라 또는 그 도시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 것처럼 남산서울타워 역시 지난 40여 년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서울의 상징물 역할을 해왔다. 남산서울타워는 서울 시내 전 지역에서 바라보이는 탑의 높이와 독특한 구조, 형태 등으로 인하여 시민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고 내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제1의 관광 명소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 바람을 몰고 온 각종 예능, 드라마의 촬영지로 이름이 높아지면서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2026-02-05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
새새남터기념성당은 대한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1984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3년 만에 완공된 성당이다. 이곳은 억새와 나무가 울창한 곳으로, 이로 인해 새나무터 또는 새남터라 불리게 되었다. 사남기로도 불리며, 조선 후기까지 숲이 울창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새남터는 조선 초반부터 군사 연무장과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당하였다. 성당에는 새남터 기념관이 있고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