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06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어필각로 412
금성면 하신리는 원래 온양 이 씨의 세거지로서 이 씨 문중에 5세 3효가 있는데 고사인 이태귀와 그의 증손 홍엽, 현손 원배로 효행이 탁월하므로 1924년 당시 유림의 천장으로 마침내 순종 황제까지 알게 되어 당대에 장한 일이라 칭찬하시고 이듬해 3월에 온양이씨계효지비(溫陽李氏繼孝之碑)라는 여덟 자의 어필(御筆)을 하사하시게 되자 지방 유림과 온양 이 씨 후손들이 합심하여 어필비를 세우는 한편, 비각을 봉건 하게 되었다. 또한 3효문에 대한 정각을 세운 바 있는데 의친왕이 온양이씨삼효문(溫陽李氏三孝門)이라는 친필을 하사했고, 1926년 봄 순종황제 승하 시에 본 손 원배공은 지방 유림과 함께 임금님께 은혜의 보답으로 전각을 봉건 키로 했다는 뜻을 전해 듣고 숭봉전(崇奉殿)이라는 친필 액자를 하사하였다. 1943년 5월경 일본인인 금산 경찰서장(石川道夫)이 숭봉전에 침입, 어영은 물론 제기 및 각종 문헌을 약탈, 숭봉전을 철폐시키는 비운을 겪었다. 현재는 충청남도 지정 문화유산자료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2026-05-06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수심대길 32
임진왜란 당시 금산성전투에서 순절한 중봉 조헌(重峰趙憲) 선생을 모신 부조사우이다. 부조사우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모시도록 조정(朝廷)에서 지정한 부조묘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선생은 주로 옥천군 안읍 밤티(沃川郡安邑栗峙)에서 생활하였지만, 자주 이 지역에 왕래하면서 후손들에게 이곳에서 살 것을 분부하였다고 한다. 이 사우는 원래 1734년(영조 10년)에 곡남리 진동산에 창건되었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 건물이 허물어지면서, 유림(儒林)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뒤편에는 선생이 이름을 짓고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의 글씨로 알려진 수심대(水心臺)라고 새겨진 글자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2026-05-06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진산로 356-10
충렬사는 해주 오 씨의 사당으로, 완월당 오응정(1548∼1597)과 그의 장자 욱, 둘째 아들 직과 손자 방언 등 3세에 걸친 4 충신을 모신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1831년(순조 31년)에 세워졌다. 오응정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조선 선조 7년(1574)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도 순천을 수비하였으며, 같은 해에 왜적이 남원을 침입하자 남원성 싸움에 참여했다가 전사하였다. 둘째 아들 직은 1619년(광해군 11년) 후금을 정벌할 때 강홍립이 항복하자 백마를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수많은 적을 죽이고 자결하였으며, 손자 방언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하자 강에 몸을 던졌다. 충렬사는 일제 말기에 일본 경찰이 갖은 책동으로 헐어버리려고 하였으나 유림과 오 씨 문중의 결사반대로 실패하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20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2026-04-21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무금로 1688
청풍사는 고려 후기 충절공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다. 이곳에 길재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길재 선생은 고려말∼조선초의 학자로, 개경에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 등 여러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몇 차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같은 마을에 살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후의 태종)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훗날 태종이 그를 불렀으나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거절하였으며,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삼은으로 일컫는다. 길재가 초년에 시묘살이를 하였던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현종 12년(1671) 후손과 고을의 선비들이 함께 불이사(不二祠)를 창건하여 숙종 3년(1678)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영조 17년(1741)에 서원남설 금령에 저촉되어 훼철되었다. 이후 영조 37년(1761)에 금산군수 민백홍과 지방유림이 ‘백세청풍(百世淸風)’ 4대자를 새긴 비를 유허에 세웠다. 이후 1804년 다시 사당을 세웠으나 고종 5년(1868) 또다시 철폐되는 비운을 겪었다. 1928년 청풍비각, 청풍사, 청풍서원이 중수되었다. 청풍사의 앞쪽에는 백세청풍비(百世淸風)와 지주중류비(支柱中流)가 있는데 이는 야은 길재의 충절을 보여주는 것이다.
2026-04-21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교촌1길 45-20
진산향교는 원래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현재의 진산중학교 자리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영조 31년(1755)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정조 4년(1780)에 중수하였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으로 훼손된 후 다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외삼문, 전교실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건물이다. 전체적으로 다른 향교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사지를 이용하였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철과 우리나라의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배향된 인물의 배향 순서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2025-03-16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비단로 298
금산향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지금의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조선 숙종 10년(1684) 현재의 위치에 다시 짓고, 수차례 중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을 두고 대성전 앞마당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방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철을,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의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배향된 인물의 배향 순서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교육 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명륜당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위치하고 있다. 그밖에 외삼문, 내삼문 등이 남아있다. 금산향교는 이와 같이 전통양식의 공간 배치를 충실히 하고 있다.
2025-10-31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태조대왕 태실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태(胎)를 봉안한 석실이며 조선 최고의 풍수지리학적 명당인 금산 만인산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는 함경도 함흥에 안치하였다가 무학대사의 지시로 금산 만인산으로 옮기고 태실비를 세웠다. 왕실에서 태를 안치하는 것은 나라의 대사일 뿐 아니라 그 행렬을 맞이하는 지방에서도 큰 영예로, 왕의 태실지가 안치된 현이나 군을 승격시킨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태조의 태를 봉안한 진산군도 주로 승격됐다. 928년 조선총독부에서 태 항아리를 서울 창경궁으로 옮겨간 후 석비와 석조물만이 남아 원형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손되었으나, 1993년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돌 난간을 둘렀고, 태실비에는 태조대왕 태실이라는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태실이 옮겨온 후에는 만인산을 태봉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1989년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산책로와 쉼터를 만들어 아름다운 자생식물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2025-10-31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용과 호랑이 모습을 각각 2기(基)의 돌에 새긴 것이다. 천내리의 서쪽을 흐르는 천내강변 제원대교(濟原大橋)에서 북쪽 100m 지점에 용석(龍石)이, 그로부터 다시 북쪽으로 500m 지점에 호석(虎石)이 위치하고 있다. 용석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여러 개의 돌기와 그 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가 조각되어 있고,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입 양편에는 아가미와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호석은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두툼하게 튀어나온 곡선과 동그라미를 조각하여 호랑이의 털 무늬를 만들었다. 호석의 몸체는 서쪽을 향하였으나 머리는 북쪽을 향하였으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안동(安東)으로 내려온 공민왕이 자신의 능묘(陵墓)의 위치를 정하고 필요한 석물(石物)로 준비하게 하였으나, 개경(開京)으로 돌아간 후 그대로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출처 : 금산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2024-06-14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로 258
용강서원은 금산군 서부에 위치한 서원으로 1680년(숙종 6)에 건립되었다. 1870년(고종 7)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가 8·15 광복 뒤 복원되었다. 구조는 5칸의 강당은 중앙에 마루를 두었고 양쪽에 협실을 배치하였는데, 유림의 회합 등 여러 행사와 학문 강론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이 서원은 바로 앞에 금강이 흘러 경관이 아름답다.
2025-12-22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금산 백령성은 남이면 건천리와 역평리 성치산 동쪽 정상부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성이다. 금산군 제원면과 추부면을 지나 충북 영동과 옥천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백자령, 대동여지도에는 탄현으로 나와 있다. 형태는 산 정상 부분을 둘러쌓은 두른 테뫼식이며, 성의 둘레는 207m이다. 성벽의 동쪽, 남쪽, 북쪽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서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다. 성벽의 너비는 4m이다. 유물로는 백제시대 각종 명문와를 포함한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