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쌈지길

쌈지길

2025-10-23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44 (관훈동)

인사동의 가장 대표적인 장소 쌈지길은 쌈지길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과 문화를 만나고 즐길 수 있는 공예품 전문 쇼핑몰이다. 한국의 인간문화재가 만든 최고급의 전통공예품과 현대공예작품, 그리고 한국의 멋이 풍기는 디자인 제품을 만나 볼 수 있다. 또한, 도자, 섬유, 금속, 목공예등의 공예샵과 젊은 디자이너들의 신선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샵을 만날 수 있다. 쌈지길 곳곳에서 전시와 공연 등의 다채로운 문화 이벤트도 열리고 있다. 쌈지길에서는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도록 도자기공예, 자개공예, 가죽, 유리, 비누 공예 등의 다양한 원데이 클래스가 준비되어 있다. 어른과 아이, 친구와 연인 누구나 함께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김시민장군 충민사

김시민장군 충민사

2025-11-21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충민사길 46

김시민장군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과 문숙공 김제갑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이다. 김시민(1554~1592)의 자는 면오, 본관은 안동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 후 진주성 싸움에서 3,800여 명의 군사와 백성으로 2만여 명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전투 후 숨어 있던 적군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김시민은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제갑은 자는 순초, 호는 의재, 본관은 안동으로 명종 8년(1553)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14년(1581)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원주로 쳐들어오자,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영원산성에 들어가 항쟁하였으나 성이 함락됐고 그의 부인 이 씨, 아들 김시백과 함께 순절하였다. 김시민은 진주 충렬사에 제향 되었으나 고종 3년(1866) 훼철되어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 하였는데 1976년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웠다.

양성향교

양성향교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교동길 33-4

양성향교는 1533년에 처음 지어졌고, 1774년에 다시 지어졌지만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두고 있다. 그 외에도 출입구 역할을 하는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人(사람 인)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중앙 3칸은 마루로, 좌우 2칸은 온돌로 되어있다. 대성전과 달리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八(여덟 팔)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양성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만 갖춘 조선 후기의 규모가 작은 향교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죽산향교

죽산향교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향교길 54-45

죽산향교는 153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오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사지 대지에 앞쪽에는 교육 공간인 동·서재가 생략된 명륜당과 내삼문이 구성되어 있고, 뒤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를 두어 앞에는 학문하는 공간, 뒤에는 제사하는 공간을 두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동무와 서무는 각각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다. 명륜당은 대성전의 중심축에서 왼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외삼문 또한 명륜당의 중심축에서 오른쪽으로 벗어나 있으며, 솟을삼문(문이 세 칸인 대문에서 가운데 문의 지붕을 한 단 높게 세운 대문)으로 되어있다. 외삼문 앞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최규서어서각

최규서어서각

2025-03-25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만리길 35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최규서[崔奎瑞 1650-1735]선생에 내린 영조의 어서[御書]와 영정[影幀]을 모신 정각[旌閣]이다. 영조는 충정공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친필로 쓴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서를 하사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정각이 선 자리에 1915년 미국 대사관이 들어서게 되어 부득이 어서를 공의 묘소가 있는 지금의 이곳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

이해룡고가

이해룡고가

2025-03-25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길 109-11

이해룡 고가는 경기도 안성시 서운산 남쪽 계곡 근처 마을에 조선 후기 건축물로서 안채에 기록된 상량문을 통해 1797년(정조21)에 안채와 사랑채가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해룡 고가는 남서향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길가에 면하여 있으며, 8칸 규모의 행랑채에 마련된 문간을 통하여 가옥의 출입이 이루어진다. 이해룡 고가는안채와 사랑채를 하나의 건물로 연결하여 지어 구조적인 이점을 활용하고, 좌향을 달리하여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확보하여 살림집 안에서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는 공간구성 방법이 돋보인다. 또 대들보나 기둥 등 목재를 다듬는 방식은 1700년대 후반의 전통가옥에서 나타나는 형태를 보존하고 있어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무양산성(무한성)

무양산성(무한성)

2024-08-27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무양산성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고성산의 남서쪽 봉우리에 축조된 둥근 모양의 산성이다. 해발 207.5m의 산 정상부와 8부 능선을 이용하여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서 쌓은 내성과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계곡 부를 포함하여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성벽을 쌓은 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 방식의 산성이다. 전체 둘레는 내성이 680m, 외성 구간이 400m이며 긴 타원형 모양이다. 외성은 내성의 일부 구간을 포함하여 북동쪽으로 확대한 모습이다. 산성의 시설물로는 문지, 치성, 건물지, 우물지 등이 발굴되었으며 유적이 위치한 곳은 하천 교통로와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육로가 발달한 요충지로 고대 사복흘 및 적성현의 치소(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측은 산성 안에 있는 운수암과 그 주변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및 토기류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운수암 입구가 내성의 문지로 추정되며 지금은 진입로 좌측으로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어 주변을 산책하고 둘러보기 좋다.

영창대군묘

영창대군묘

2025-06-18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조선 선조의 14명 아들 중 유일하게 정비인 인목왕후가 낳은 아들로 선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영창대군의 묘이다. 유영경 등 소북파의 지지로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대신에 세자에 책봉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 등 대북파에 의해 왕위에 위협을 주는 인물로 미움을 받았다. 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7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들로 하여금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 진술케 하였다. 이 결과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강화부사가 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였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 왕실의 무덤은 능, 원, 묘로 구별되는데 묘란 일반적인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왕의 자손이나 후궁,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 등의 무덤을 뜻한다. 영창대군 묘소는 원래 광주군 남한산성 아래에 있었는데 성남시 개발계획에 따라 1971년 8월에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안성죽산리석불입상

안성죽산리석불입상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봉업사지 북쪽 죽주산성 아래에 위치한 석불입상이다. 통일 신라 여래상의 전통적인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여 정제된 조각수법을 보이는 고려 전기 불상의 우수한 사례로 여겨진다. 절단되었던 머리와 신체를 접합하였으며 발은 최근에 복원하였다. 불상은 연꽃이 새겨진 둥근 대좌 위에 서 있으며, 광배는 남아 있지 않다. 민머리 위에는 육계(상투 모양의 머리묶음)가 큼직하다. 신체에 비해 약간 큰 얼굴은 둥글고 귀가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다. 이목구비가 비교적 작은 편이나 눈은 거의 감은 상태로 가로로 길다. 양팔을 신체에 붙인 채 오른손은 허리 부근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손끝을 아래로 하여 펼쳐 보이고 있다. 왼팔 역시 신체에 밀착한 채 가지런히 내리고 있으며, 왼손도 밑으로 내리고 있다. 양쪽 어깨에 걸쳐져 내려오는 대의는 신체 전면을 감싸고 있는데 가슴에서 촘촘한 U자형 주름을 형성하다 대퇴부에서 Y자를 형성하며 양쪽 다리로 갈라져 각기 기다란 U자형 주름을 형성하며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이는 통일 신라 시대 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유행했던 형식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안성죽산리당간지주

안성죽산리당간지주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가 서 있는 봉업사지(奉業寺址)는 여러 번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신라 말기에 화차사(華次寺)로 창건되어, 고려 시대에 들어와 크게 중창되면서 봉업사로 절 이름을 바꾸어 번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당간지주는 5층 석탑과 같은 공간에 있는데, 원위치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당간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두 지주를 사각형 기둥처럼 동일하게 다듬어 세웠다. 각 면에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어 거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당간지주의 모서리는 경사지게 깎아 부드럽게 하였으며, 정상부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가면서 곡선을 그리도록 다듬어 다소나마 장식적인 기교를 엿볼 수 있다. 당간지주 안쪽 면에 별다른 흔적은 없으며, 꼭대기에 사각형으로 판 간구를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할 때 연결하는 간을 끼우도록 했다. 이처럼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거칠게 다듬어 정연하지는 못하다. 하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고, 봉업사를 크게 중창할 때 함께 제작한 것으로 보여,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간지주는 기단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려 시대 들어와 세련되고 장식적인 외관보다는 안정적이고 기능에 충실한 당간지주를 건립하는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