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총지사지석장승

총지사지석장승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총지사터 입구 양옆에 나란히 서 있는 2기의 돌장승으로, 절의 영역표시 기능과 더불어 경내에서의 수렵·어로 등의 금지를 알리며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상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거대한 화강석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려 아무런 조각이 없는 민둥머리와 이마, 커다란 왕방울 눈, 우뚝 솟은 주먹코와 작은 입이 조각되어 있다. 두 장승의 모습이 거의 비슷하나, 남장승은 외수염을 하나 더 조각해 두었다. 장승의 앞에는 각각 널찍한 판돌의 제단이 놓여 있으나, 장승과 관련된 의례는 전하지 않고, 다만 할머니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소원을 비는 곳이라 한다. 조선 현종 7년(1666) 지금의 총지사를 중건하면서 함께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국가유산청)

장성원덕리미륵석불

장성원덕리미륵석불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장성 원덕사 경내에 있는 원덕리미륵석불은 돌기둥 모양으로 가슴 아래의 몸체를 먼저 만든 뒤, 그 위로 가슴부터 머리까지는 다른 돌을 얹어 조각하였으며 얼굴, 손, 옷 주름 등을 표현하였다. 머리에는 옥개석과 같은 8각의 넓은 보관을 쓰고 있고, 얼굴은 큼직한 사각형 모양이며, 큰 눈과 뭉툭한 코 그리고 두터운 입술 등의 표현이 석장승과 같은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을 짓고 있다. 석불이 있는 원덕마을은 갈재 남쪽 계곡의 수구에 해당하므로 장성의 북쪽에서 악귀를 막던 비보장승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입체감 없는 신체는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내린 모습으로 얼어붙은 듯 경직되었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앞면에만 주름이 표현되었는데, 가슴 아래부터는 반복적인 선으로 돋을새김했다. 근엄한 인상보다는 토속미 넘치는 친근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모양이나 기법 등에서 볼 때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말 또는 조선초로 추정된다.

화순대리석불입상

화순대리석불입상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화순군 화순읍 대리

화순 대리 석불입상은 조선 후기의 석불이다. 석불은 예로부터 신앙의 대상으로 불교가 유입된 삼국 시대 이후 통일 신라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어수선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지방마다 특색 있는 석불이 조성되었다. 조선 시대는 억불 정책으로 불교 미술품의 조성이 활발하지 못하나 민간 신앙의 대상 중 하나로 이어져 왔다. 화순 대리 석불입상은 높이가 350cm 달하는 석불로, 돌기둥에 가까운 자연석을 사각형으로 대충 다듬은 뒤 앞쪽에 얼굴 부분만 돋을새김(평평한 면에 글자가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것)을 하고 나머지 신체 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석불로, 넓적한 코와 부라린 눈 등 장승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 보이며 턱과 구분되지 않고 바로 어깨로 연결되는 기법은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석장승에서 흔히 보이는 기법이다.

원풍리 마애불병좌상

원풍리 마애불병좌상

2025-11-21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암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마애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넓적하면서도 힘 있는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은 평면적으로 양감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 신체의 표현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형식화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무딘 선으로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나, 세세한 것은 닳아서 잘 알 수 없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예는 죽령마애불, 대전사지 출토 청동이불병좌상 등이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의 설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기 범어사의 고승인 여상조사가 조성, 또는 고려 때 나옹대사가 조성한 것이라고도 하나 고려 중기인 12C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만동묘정비

만동묘정비

2025-11-21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에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놓은 비석이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 사당에 자리 잡고 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1917년 일제가 만동묘의 제사를 금지하고 이를 반대하는 유림을 구속하였으나 유림에서는 춘추계를 조직하여 몰래 제사를 지냈는데 일제는 1937년에 이들을 체포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를 징으로 쪼아 훼손하더니 1942년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묻어버렸다. 1942년 이후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 후 찾아 다시 세웠다. 묘정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바닥돌 위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신과 옥개석을 얹은 일반형 석비이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다.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들다. 1999년 우암 송시열 관련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된 후 2002년부터 2005년 사이 만동묘, 성공문, 묘정비각, 외삼문, 증반청, 존사청을 복원하였다.

용흥궁

용흥궁

2026-02-25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기둥머리에서 보와 도리가 직교하여 직접 결구되는 민도리양식이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서울 삼전도비

서울 삼전도비

2025-07-21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학사로 136 (잠실동)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송파구청 홈페이지)

반계선생유적지

반계선생유적지

2025-03-18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보안면 반계로 97-68

조선 효종·현종 때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은 1648년 2차례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효종 4년(1653)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 일생을 숨어 지냈다. 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거듭 벼슬자리를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반계수록』26권을 펴냈다. 선생의 학문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는데, 선생의 주된 저서인 『반계수록』에서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여러 가지 주장을 펴 정약용 등의 후기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김제 벽골제

김제 벽골제

2026-05-27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로 442

김제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옛 저수지의 중수비와 둑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8 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1420년(세종 2년)에 큰 폭우로 유실되었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 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 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주암댐지석묘군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 부르며 선돌과 함께 거석문화의 하나로 무덤이나 제단 등으로 사용되었다. 고인돌은 유럽, 북아메리카, 지중해 연안, 아시아 등 거의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나 각 지역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전남광주통합특별시지방에 2만여 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가장 밀집된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인돌 공원 안의 주암댐지석묘군은 1986년~1987년에 걸쳐 주암댐 수몰지구 내에서 발굴조사된 고인돌 중에서 형태상으로 양호한 99기를 옮겨다가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고인돌 공원에 이전 복원해 놓은 것이며 뒤에 추가로 옮겼는데 발굴된 고인돌을 보존하고 학술 자료 전시를 통한 후세들의 교육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주암댐지석묘군 주변으로 신석기시대움집, 송주곡천유적, 청동기시대움집, 고인돌전시관, 유물전시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