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8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서울 관상감 관천대는 조선시대 별을 관측하던 곳으로 조선시대 기상대나 천문대인 관상감이 있던 자리에 설치한 것이다. 관측 기구로서 소간의를 올려놓아 소간의대, 또는 별을 관측하는 대라는 뜻으로 첨성대라고도 불린다. 세종 16년(1434)에 설치된 서운관의 관측대로서, 서운관은 천문, 지리, 측후, 물시계와 관련된 일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경주에 있는 신라의 첨성대, 개성 만월대의 고려 첨성대, 서울 창경궁 내의 관천대와 더불어 우리나라 천문 관측역사의 발전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2026-06-10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0 (계산동2가)
계산성당은 중구 계산오거리에 위치하며 범어대성당과 함께 천주교 대구 대교구의 공동 주교좌성당이다. 본당의 주보성인은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이다. 1898년에 본당을 세웠는데 명동성당을 건축하고 전주 전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맡았으며 특히 스테인드 글라스는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하였다. 도심 가까이 위치하고 야간 조명이 설치되어 아름다운 야경도 감상할 수 있으며 성당 주위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도심에서 휴식을 위해 방문하는 이들도 많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대구 최초의 가톨릭 성당인 계산성당과 역시 대구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대구제일교회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본다는 것이다. 교파를 초월하여 계산동, 동산동 일대는 대구 그리스도교 역사의 출발지점인 것이다. 건립 당시 현 위치와 서편 청라언덕 사이에 고민하다가 노인 신자들의 요청으로 현 위치에 성당을 건립하기로 정해졌다고 한다. 원래는 성공회 강화성당과 비슷한 한옥식 건물이었지만, 화재로 1901년에 전소되자 새로 고딕식 성당을 지었으며 경상도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으로 문화재청의 관리를 받고 있다. 계산동성당은 남구 대명동의 가르멜여자수도원,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더불어 도심지역에서 실제 종을 타종하는 몇 안 되는 곳들 중 하나다. 때문에 삼종시간의 종소리를 들으면 마치 유럽에 여행을 온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2026-07-30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
전주 전동성당은 사적으로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 터에 세워졌다. 이 건물은 천주교 신자들을 사형했던 전라북도 전주시 전동 풍남문 밖에 지어진 성당이다. 조선시대의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었으므로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히 순교지의 하나가 됐다. 정조 15년(1791)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순조 원년(1801)에 호남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 등이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됐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이곳에서 유항검과 유관검 형제가 육시형을, 윤지헌, 김유산, 이우집 등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들의 순교의 뜻을 기리고자 1891년(고종 28)에 프랑스 보두네(Baudenet) 신부가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성당 건립에 착수해 1914년에 완공했다. 이 성당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으며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에게 설계를 맡겨 23년 만에 완공한 것이다. 회색과 붉은색 벽돌을 이용해 지은 건물은 겉모습이 서울의 명동성당과 비슷하며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 국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처음 이 성당은 천주교 순교지인 풍남문 밖에 세웠으나 후에 현재의 자리에 확장해 지은 것이다.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장방형의 평면에 외부는 벽돌로 쌓았으며 중앙과 좌우에 비잔틴 양식의 종탑이 있다. 내부 천장은 아치형이며 양옆의 통로 위 천장은 십자 형태로 교차된 아치형이다. 성당 건축에 사용된 일부 벽돌은 당시 일본 통감부가 전주 읍성을 헐면서 나온 흙을 벽돌로 구웠으며 전주 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에서 나온 돌로 성당의 주춧돌을 삼았다고 한다.
2025-07-09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47-1
약현(藥峴) 성당은 소규모 성당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1886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천주교를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자 명동 성당 아래 공소(公所)로 설립되었다. 1891년 당시 명동 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두세 신부가 합동 (蛤洞)에 대지를 마련하고, 부주교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시공감독을 맡아 그 다음해인 1892년에 약현 성당이 탄생하였다. 이 성당이 위치한 곳은 예전에 약초를 재배했던 지역으로 ‘약초 밭이 있는 고개’ 라는 뜻의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에 줄여서 ‘약현’이라고 했는데, 서울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사용되어 약현성당이란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이 성당은 우리 나라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주목된다. 또한 고딕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반원형의 둔중한 아치 형태 지붕과 창의 면적을 좁게 나타내는 등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갖는 벽돌조 건물이다. 비교적 소규모의 성당으로 옆면 창은 처마 높이가 낮아 뾰족아치가 아닌 원형아치로 되어 있으나, 앞면의 출입구와 옆면 좌우로 돌출한 출입구 창 부분이 각기 뾰족아치를 이루어 고딕 모양을 하고 있다.
2026-09-22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23 (남성로)
대구제일교회는 1893년에 설립된 교회로 경상북도, 대구시 최초의 교회이며, 약령시 약전골목 한복판 약령시 한방박물관, 대구교남 YMCA회관과 같이 있다. 대구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계산주교좌성당과는 서성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예전에는 성안에 있다 해서 성내교회 혹은 남문안에 위치하여 남문안예배당, 남문내교회로도 불리었다. 건물은 전형적인 고딕 양식으로 서유럽의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의 층수는 2층이며, 종탑은 5층이고 높이는 33m이다. 위치의 특성상 약령시 한방문화페스티벌이나 대구시 주요 축제 때 주 관광지가 되며 대구 시내 투어나 대구 근대 골목길 코스에도 포함되어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곳이다. 최초의 예배당은 기존의 한옥집을 1896년에 매입해 사용하여 남성정 교회로 이름하다가, 1908년에 두 번째 예배당을 지었다. 두 번째 예배당은 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전통 목수들이 함께 지은, 단층의 건물로 교회의 정면 한가운데 출입구를 겸한 종탑을 세우고 그 양쪽에 세로로 긴 창문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좌우가 대칭을 이루었다. 이 건물의 양철지붕, 창문, 종탑 등은 당시 대구 부민들에게는 매우 이색적이고 경이로운 것으로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31년 철거했고 새로 1933년 세 번째 예배당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2층으로 건물을 준공하였고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6년에 고딕 양식의 종탑을 추가적으로 세워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종탑부는 1층에서 5층까지 창문이 제각기 다르게 설계됐고 윗부분에는 팔각형의 뾰족탑을 세웠다. 이 같은 특성과 역사성에 기인하여 1992년 본당과 종탑이 대구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양상은 평면이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고, 앞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오른쪽에는 종탑을 세운 간결한 고딕 건물이다. 대구 제일교회는 대구의 수많은 교회 건물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고, 기독교가 근대화에 기여한 상징물로서 근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94년 동산동으로 본당을 건축하여 갔으며 이곳은 100여년간 대구제일교회로 사용된 곳이다. 이후 약령시한의학박물관 옆에서 기독교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독교역사관에는 개화기 시절 사용했던 성경, 찬송가, 헌금함 등 다양한 물품과 당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대구제일교회의 연혁, 역사, 선교사들의 활동 이야기가 기록, 전시되어 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교회로서 독립선언문의 탁본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2025-11-04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로 407
1908년 전주선 교부의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가 지은 한옥교회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사기(事記)에 의하면, 처음의 교회는 1905년에 5칸으로 지었으나,190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 금산교회 옆으로 1988년에 새로 지은 교회본당과 사택이 들어서 있다. 건물은 남북방향으로 5칸이며, 여기에서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 뒤집힌ㄱ자 형태를 이룬다. 내부는 통칸으로 이루어졌으며, 남북방향 5칸과 동쪽방향 2칸이 만나는 곳에 강단을 설치하여 남쪽으로 남자석, 동쪽으로 여자석을 분리하여 마련하였다. 이는 한국 초기 교회건축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로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구분이라는 큰 문제를 ㄱ자형 건물을 지어 남녀가 나뉘어 예배를 보게 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서양식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이 교회는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각 구조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문화재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2025-09-03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주문도길 256-1
강화도는 19세기 말 조선이 문호를 개방할 때 지리적 여건으로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탓에 서양인들의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당시에 세워진 교회 중 지금까지 강화도에 남아있는 것만 세 곳에 이른다. 1900년에 세운 성공회 강화 성당, 1906년에 세워진 강화 온수리 성공회 교회 그리고 서도 중앙 교회가 현존하고 있는 당시의 교회들이다. 그 중 서도 중앙 교회는 1923년 교인들의 건축 헌금으로 지어지기 시작해 7월에 완공된 한옥 예배당이다. 1978년 주문 교회에서 서도 중앙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건물 내부는 중세 전기의 서양 교회 양식을 하고 있지만 매우 단순하여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과 측랑, 중앙의 강단으로만 구성돼 있다. 전면에는 강단 위에 설교대를 두었으며,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이 건축물은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 형식을 바탕으로 서양 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으면서 지금도 종교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2026-03-12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6 (정동)
정동교회는 개신교가 이 땅에 보급된 후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이다.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종교 활동을 하였으나 예배만을 위한 건물을 구입하여 베델(Bethel) 예배당이라 하고 1887년 첫 예배를 시작하였다.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 건립이 필요하게 되자 1895년 공사를 시작하여 1897년 12월 26일 봉헌식을 가졌다. 이 건물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19세기 교회 건물이다. 정동교회의 구조는 단층이지만 층고가 높아 2층으로 보이고 남측 종각은 3층 높이로 지어졌다. 미국식의 단순화된 고딕양식으로 건립 당시의 사진을 보면 이웃한 기와집이나 덕수궁과 잘 어울린다. 이곳에서는 많은 토론회와 음악회 등이 열려 신문화 수용과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380.16m²(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 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578.5m²(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모습에는 손상이 없다. 벽돌 쌓기를 하였으며, 곳곳에 아치형의 창문을 내어 고딕양식의 단순화된 교회당 모습을 이루고 있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된다. 이 교회당의 종은 장식 없는 내부 기둥들의 겉모습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건물이다.
2025-05-12
대전광역시 유성구 자운로245번길 80
수운교 천단은 대전 유성구 추목동에 위치한 목조건물로, 1929년 4월 15일 경복궁을 지은 최원식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천단(도솔천), 출입문인 광덕문, 육각형의 종각 등 총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단은 단정한 정원 위 높은 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원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방으로 문이 나 있다. 정면의 광덕문이 가장 크고 상징적인 출입구다. 건물 내부에는 12마리의 큰 용과 44마리의 작은 용, 88개의 봉화산이 조각되어 있으며, 금강탑, 무량수탑, 불보살·선관·사천왕 조각, 동진보살 탱화 등이 장식되어 있다. 문살의 도깨비 문양과 오색 단청은 사찰 건축과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붕에는 원래 궁궐 및 왕실 건축에만 쓰이던 12지신상이 배치되어 건물의 위엄을 더하고 있다. 한때 이 지역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6.20 사업으로 모두 이전되었으며, 천단 역시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신도들의 노력으로 현재 위치를 유지하게 되었다. 천단은 건축미뿐만 아니라 주변의 자연경관도 뛰어나, 금병산과 소나무숲 사이로 부는 산들바람과 은은한 풍경 소리가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를 더한다.
2026-06-01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행사를 하는 곳이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주관으로 1918년에 시공하여 1921년에 완공되었다. 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공사비로 충당하였는데, 공사비에서 남은 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독립운동 기금을 모으기 위해 대교당 건축이란 명분을 앞세워 1918년 4월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에 천도교가 3·1운동의 중심단체로 활동하면서 건축비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공사가 늦어졌다. 이곳에서는 천도교의 종교의식 외에 각종 정치집회, 예술공연, 강연회 등 일반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이 건물은 비교적 높고 웅장하여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더불어 서울시내 3대 건물로 꼽혔다. 3·1운동 전후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이 건물은 천도교의 보국안민 기치를 상징하게 되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고 화강석을 섞어 써 색과 재질감의 조화가 뛰어나다. 한국의 근대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젯세션(Secession, 분리파) 양식의 건축이다. 이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독일인 건축가 안톤 페러를 직원으로 채용함으로써 독일의 건축사조를 접한 데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1층과 2층의 날개 부분에는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의 몸체는 내부기둥이 없는 강당 형식의 대집회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상당히 큰 폭의 공간을 덮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구조적 해결방법이 적용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