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용두암해수랜드

용두암해수랜드

2025-04-17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서해안로 630

용두암해수랜드는 제주시 해안도로와 용두암 인근에 있는 사우나이다. 야자수로 조경을 둘러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해수랜드는 넓은 규모의 사우나 종합시설과 정원 내 전통불한증막, 대형폭포, 이벤트 광장인 낙원의 쉼터, 주차장 등의 시설을 갖춘 대형 목욕 업장이다. 단순히 몸을 씻어내는 목욕이 아니라 휴식과 즐거움이 있는 여가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각종 미네랄이 풍부한 청정 바닷물을 이용하는 해수사우나와 찜질방에서 피로를 풀 수 있고, 해수랜드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절경이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지리산 천왕봉

지리산 천왕봉

2025-07-18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대로

천왕봉(1,915.4m)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남한에서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다. 거대한 바위가 하늘을 받치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있다. 1982년 경상남도가 정상에 표지석(높이 1.5m)을 세웠으며 이후 이 비석은 천왕봉을 찾는 이들의 기원과 바람을 담게 되었다. 천왕봉의 일출은 굉장히 아름다워 산청 9경의 제1경과 지리산 8경의 제1경으로 꼽힐 정도이다. 고도가 높은 만큼 항상 구름에 감싸여 있어 천왕봉에서 일출을 볼 수 있는 확률은 낮은데, 여러 번 도전해서라도 그 광경을 꼭 한번 보고 싶다는 이들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서 시작하는 산행 코스는 천왕봉을 유일하게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최단 등반 코스이다. 중산 두류 생태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계곡 가득 쏟아져 내려오는 시원한 물소리와 푸른 수목을 즐기며 등반을 시작할 수 있다. 지리산 국립공원 중산리 탐방안내소 앞에 중산리계곡을 따라 시작하는 코스도 있다.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뜻의 통천문과 망바위를 지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라는 법계사를 만날 수 있다. 열심히 올라가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뜻의 개선문을 지나면 마침내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산의 바다와 손 닿을 듯이 가까운 하늘이 있는 천왕봉 정상이 반긴다.

파주 장릉(인조·인열왕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주 장릉(인조·인열왕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5-07-02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파주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재위 1623~1649)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1594~1636)의 능이다. 장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인조, 오른쪽에 인열왕후를 모셨다. 장릉은 1635년(인조 13) 인열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파주 운천리에 조성되었다.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었고,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인조의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장릉이 풍수상 불길하고, 화재가 자주 일어나며 뱀의 피해가 잦자 1731년(영조 7)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기면서 능의 형식을 쌍릉에서 세종의 영릉(英陵)의 예에 따라 합장릉으로 바꾸었다. 현재 장릉 능침 석물은 옛 장릉의 석물과 옮긴 후 새로 만든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의 형태를 볼 수 있다.

남양주 사릉(정순왕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양주 사릉(정순왕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6-03-11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 씨의 능이다. 1521년(중종 16) 정순왕후가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묘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 해주 정 씨의 집안 묘역인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고, 해주 정 씨 집안에서 제사도 지내주었다. 1698년(숙종 24) 정순왕후로 복위되면서 능의 이름을 사릉이라 하고 묘를 왕릉 제도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이때 사릉 주변에 있던 해주 정 씨 묘역을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숙종의 명으로 묘들을 그대로 두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사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을 세웠고, 석양과 석호는 1쌍씩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홍살문 등이 있고, 비각 안에는 ‘조선국 정순왕후 사릉(朝鮮國 定順王后 思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단속사 정당매

단속사 정당매

2025-04-04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호암로673번길 12-1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줄기가 힘차께 뻗어 내려오다가 멈춘 옥녀봉 아래 남향으로 자리한 단속사 절터에는 동.서의 삼층석탑과 주춧돌이 어지러이 놓인 가운데 매화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매화나무로서는 수령이 가장 오래된 정당매(政堂梅)이다. 인재 강희안(1419~1464)의《양화소록(養花小錄에)》에 보면 우리 선조 통정공께서 소년시절에 지리산 단속사에서 글공부를 하실 때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뜰 앞에 심어놓고, 시 한 수를 읊었다고 씌여 있다. 여기서 인재가 말하는 선조는 고려 말기의 문신인 통정(通亭) 강회백(1357~1402)으로 우왕2년(137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점점 높아져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성과 문하성의 종2품 벼슬)겸 대사헌에 이르렀다. 공양왕 4년(1392) 정몽주가 살해된 뒤 진양에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태조 7년(1398)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다. 그는 경남 산청 출신으로 강희안의 조부가 되며 통정이 소년시절 정당매를 심고 시를 읊었다. 통정집에 기록된 또 하나의 시는 그가 46세로 일생을 마치기 전에 손수 심은 정당매를 찾아와 읊은 시로써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커다란 감동과 감회를 느끼게 한다. 단속사의 스님들이 공의 재덕(才德)을 생각하고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그 매화를 보면 곧 공을 본 듯 하였다. 해마다 흙으로 뿌리를 다져주고 북돋아 기르기를 때를 맞춰 알맞게 하였다. 그 가지의 모양이 가까스로 굽고 또 푸른 이끼가 나무줄기를 감싼 것이 《매보(梅譜)》에서 말한 고매(古梅)와 다름이 없으니 참으로 영남의 한 고물이라 하겠다. 이로부터 영남에 나랏일로 오는 사람들이 이 고을에 오면 누구든지 단속사를 찾아서 그 매화를 감상하고 우리 선조의 시운에 맞춰 시를 써서 문 위에 걸어놓곤 하였다. 이와 같이 단속사의 스님들은 이 매화나무를 극진히 보살피게 되었고, 통정공의 후손들과 영남에 내려오게 된 관리들이 정당매를 찾게 되었다. 이 매화나무의 나이는 통정공이 소년시절 단속사에서 글을 읽을 때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가 이 절에서 공부한 시기를 20세 이전의 등과하기 전으로 본다면 대체로 1376년 이전에 식재된 것으로 볼 수 있어 그 수령은 630년이 넘었을 것으로 본다. 현재 정당매는 높이 8m에 둘레가 1.5m로서 근간에서 4본의 지간이 생겨 위로 혹은 옆으로 뻗었다. 꽃의 색깔은 백색이며 홑꽃이다. 3월 20일 전후이면 어김없이 꽃망울을 터뜨려 맑은 향기를 퍼뜨린다. 후손들은 이 정당매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각을 짓고 비를 세웠다. 매각(梅閣)은 1915년에 매비의 건립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정당매각(政堂梅閣)'이란 넉자로 된 현판이 걸려 있으며, 비각 안에는 매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정당매각기(政堂梅閣記)'와 통정공의 매화원운(梅花原韻)의 시와 후손들의 시 여러 편이 걸려 있다. 현재 이 정당매는 1982년 11월 10일자로 경상남도의 도나무(고유번호 12~41호)로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도천서원

도천서원

2025-03-16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문익점로 34-32

도천서원은 문익점(1329∼1398)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나라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익점 선생은 고려 말기의 학자이다 문신으로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서원은 조선 세조 7년(1461)에 세웠으며, 조선 정조 11년(1787)에 ‘도천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았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75년에 사당인 삼우사를 짓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서원 내의 신안사재는 조선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이며, 현재 건물은 조선 순조 4년(1804)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서원의 전체적인 배치는 공부하는 공간인 강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앞쪽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삼우사가 뒤쪽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되어있다. 또한 출입구인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으며, 제사 때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신안사재가 있다. 신안사재는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지붕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양쪽 끝 한 칸씩 넓은 마루를 두었다.

삼장사지 삼층석탑

삼장사지 삼층석탑

2025-03-16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

산청 삼장사지 삼층석탑은 삼장사의 옛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일부 수습하여 세워 놓았다. 삼장사는 절이름의 유래나 역사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밭으로 변한 주변에 건물의 기단을 비롯한 여러 석조물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2층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원래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만 기둥조각을 해두었을 뿐 다른 꾸밈은 보이지 않는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수평을 이루는 처마선은 양끝에서 살짝씩만 들려 있다. 5층 석탑으로 추측되어 통일신라의 석탑으로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며, 세부 수법에서 지붕돌의 밑면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등 간략화되고 약해진 모습들이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덕산사(산청)

덕산사(산청)

2025-09-05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하내원로 256

덕산사는 657년 무염(無染) 국사가 창건하였다. 본래 덕산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1609년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고 수백 년 동안 절터만 남아 있었는데 1959년 원경스님이 절을 다시 세우며 내원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2020년 10월 내원사 대웅전의 위치 고증을 위한 시굴 조사에서 덕산사라는 사찰명이 새겨진 기와 파편이 발견되어 내원사가 덕산사 터에 지어진 것을 확인하였고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2021년 3월 원래 이름인 덕산사로 사찰 명칭이 변경되었다. 덕산사는 장당골과 내원골이 합쳐지는 위치에 자리하여 사찰 어디에서나 계곡의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 사찰이 물 위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흐린 날에는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신비감을 더해준다.

산청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

산청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

2025-08-20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호암로673번길 12-1

단속사 옛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중 동쪽에 세워진 것이 이 탑으로,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의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그 위로 기단을 한 층 더 올린 후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쌓아 탑신을 올려놓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적당하고, 위로 오를수록 탑신의 크기가 균형을 이루도록 구성되어 있어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함께 세워져 있는 서탑과 비교할 때 그 규모와 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쌍탑의 배치와 더불어 주목되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조성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속사지에는 신라시대의 유명한 화가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으며, 동 삼층석탑은 신라 중기 이후의 전형적인 신라 양식을 갖추고 있다. 특히 기단부가 상·하 2층이며, 하층의 탱주가 2주이고, 상층의 탱주가 1주인 점은 신라 중대 이후의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산천재 남명매

2025-04-02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 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다. 선생은 1501년(연산 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