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8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산로4길 180
신륵사는 월악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1960년에 법당인 극락전을 중수하면서 쓴 『월악산 신륵사 중수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4년(582년)에 아도 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후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 원효대사가 고쳐지었고, 고려 공민왕 때 무학대사가 다시 고쳐지었다고 한다. 또 조선 광해군(재위 1608~1623년) 때 사명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 기록과 함께 절에 남아있는 삼층석탑과 석재 및 극락전으로 미루어볼 때 신륵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창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고려 시대에서 조선 전기에 걸친 연혁은 전혀 알 수 없다. 임진왜란 후 조선시대 후기에 중건되었는데, 창건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중건되기 전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건되었다고 하더라도 절터나 현존하는 건물로 보아 사세(寺勢)는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부터 선원(禪院)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60년에 한국전쟁으로 퇴락한 극락전을 중수한 바 있고, 1981년에 삼층석탑을 해체하여 보수한 바 있다. 이후 근래에 들어와 2001년에 산신각을 창건한 것을 비롯해 약 사당과 요사를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륵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보살좌상, 극락전 벽화 및 단청 등이 있다.
2024-11-05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동산길 11
영천시 신녕면 완전리에 있는 신녕포교당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0 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200여 년 전 법륜사를 계승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도가 1880년(고종 17)에 조성된 것이어서 법륜사의 초창은 19세기 후반임을 알 수 있으며 현 포교당의 건립은 1924년 박희웅 화상에 의해 세워졌고, 1961년 학산 스님이 발원하여 포교당 내 산령각을 건립하고 산신도를 봉안하였다. 그래서 입구에 신녕 포교당과 법륜사의 푯말이 나란히 적혀 있다. 신녕포교당은 지역민의 교육과 불법 홍보를 위한 도심 속의 사찰로 인근 군부대의 군 법회를 통한 포교 활동에 주력하고 있고 경내에는 1924년 건립된 극락전과 요사, 석탑이 있다.
2025-12-11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의 무덤이다. 경문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 헌강왕은 왕은 불교와 국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문치를 지향하였다. 재위 기간에 해마다 풍년이 들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헌강왕이 죽은 후에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이 있는 곳은 경주 남산 북동쪽의 자락이다. 무덤은 높이 4.2m, 지름 15.3m의 둥근형태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 밑둘레에 돌을 4단으로 쌓았다. 1993년에 발굴조사로 석실 내부 구조를 확인했다. 동남쪽으로 널길이 있고, 서쪽으로 석실을 배치하였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등이 있으며, 서쪽 벽 접하여 시신을 안치한 시상이 있다.
2025-12-11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이 능은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의 무덤이다. 정강왕은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헌강왕의 동생이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여 왕이 친히 강연을 들었다. 정강왕은 병이 깊어지자 누이동생인 만(진성여왕)이 왕위를 잇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은 만 1년에 불과하다. 헌강왕과 마찬가지로 보리사 동남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강왕릉은 경주 남산의 북동쪽 능선 끝자락에 있는데, 북쪽에는 헌강왕릉이 있다. 무덤의 외형은 흙으로 덮은 둥근 형태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밑둘레에 3단으로 돌을 쌓았다. 그중 제일 밑단만이 밖으로 약간 나왔으며, 무덤 앞에는 돌단이 있는데, 그 위에 돌로 만든 작은 제사상이 있다. 무덤의 구조는 헌강왕릉과 같다. 그러나 1993년 헌강왕릉의 내부조사 결과, 그 구조와 나온 유물들이 8세기 이전의 형식이어서 이 왕들이 왕위에 있던 9세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
2025-12-03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화양남산길 355
신둔사는 영남의 명산이며 이 고장의 진산인 남산(南山)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1173년 보조국사 지눌이 봉림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1667년 상견대사가 중창하였다. 이후 1878년 중건 당시에 이름을 신둔사로 다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근대에는 1926년에 송호영찬 승려가 중수하면서 오늘날 신둔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경내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청풍루, 범종각 그리고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의 좌측 뒤편에는 삼성각이 있으며, 내부에는 칠성도를 비롯하여 독성도,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입구 역할을 하는 누각인 청풍루는 주로 신도들의 법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삼정로66번길 42-10
신광사는 근현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지역 최초의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지금은 국가 지정 전통 사찰이다. 원래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동구 지산동 조선대학교 교내에 있었는데, 1993년 북구 두암동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송광사의 말사이다. 일주문, 대웅전 1동, 삼성각 1동, ‘ㄷ’자형 반야당 1동, 종각 1동, 무설당 요사채 1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3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시내 최동열의 모친 김청재월 보살의 시주금으로 선암사 광주시 서방포교당으로 지산동에 창건되었다. 그 뒤 안혜운 스님이 인수하였다. 1964년 법당이 협소하여 법당과 선방을 중창하였고, 1974년 요사가 낡아 헐어지게 되자 요사와 강당을 중창하였다. 근래에는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본사를 옮기고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전법도량으로서 절을 이끌어왔다. 그러던 중 1990년 조선대 교내에 있던 사찰 부지를 팔고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 뒤 최경주 스님이 절의 살림을 맡아 1992년 대웅전에 불상과 보살상을 봉안하였고, 요사채, 삼성각, 지하실 등의 대대적인 불사를 하였다. 2016년 제3대 주지인 동현이 주석하면서 불교 수행과 포교, 비구니 후학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2025-10-30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토골고개길 24
신광사는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 있는 노적산에 자리한 사찰이다. 창건연대는 약 160년 전으로 추측되며, 1920년 이경직 주지가 복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창건 당시 토골절, 수양사(修養寺) 등으로 불리었으며, 혜원 스님이 1980년 신광사로 개칭하였다. 신광사는 젋은 활기가 흐르는 사찰로 역사가 길지 않음에도 젊은 대학생들이 살고 있는 대학교 세종캠퍼스가 근처에 있으며,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광사는 참배객이 접근하기 좋은 곳에 있으면서 인연을 맺은 이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불법을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곳이다. 이러한 노력은 사찰 곳곳에 배치된 석물 하나하나에도 배어 나오고, 법당 안에 봉안된 불상에서도 느낄 수 있다.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군 해제면 산길로 266-27
원갑사는 영광 불갑사, 영암 도갑사와 함께 남도의 3갑사라 불린다. 이 절은 통일신라 때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근거를 찾기 어려워 지은 시기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원갑사에는 강산사에 대한 현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오래된 절이 무너지자 신도들이 중수하기 위해 돈을 모았는데, 목우암의 신도들이 이야기를 듣고 도와 1908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절의 자리도 세 차례 옮겼는데, 그에 따라 이름도 강산사, 당산사, 원갑사로 바뀌었다. 절 경내에는 법당인 무량전과 요사채가 있다. 무량전은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2026-06-30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영암군 신북면 하정길 8
영팔정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문신인 하정 유관이 주위 경치에 감탄하여 아들 맹문에게 시켜 조선 1406년에 지은 정자이다. 처음에는 모산리의 ‘모’ 자와 호인 하정의 ‘정‘ 자를 따서 ‘모정’이라고 불렀으나 훗날 율곡 이이·고경명·남이공·유상운 등이 주변 경관을 팔영시(八詠詩)로 읊어서 영팔정으로 바뀌었다. 1689년에 영의정을 지낸 유상운이 건물을 고친 것 외에는 수리한 내력이 알려져 있지 않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내부는 방이나 벽체 없이 사방이 개방된 정사각형 평면이며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오른쪽에만 난간을 설치하였다. 정자 안에 제영문·기문 현판과 동계책이 보관되어 있다.
2025-08-19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경주 남산 서쪽 약간 경사진 지점에 있는 일성왕릉은 신라 제7대 일성왕(재위 134∼154)을 모신 곳이다. 봉분의 높이 7m, 직경 10m이며 하단에는 석축을 쌓았다. 봉분 전면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호석으로 보이는 석열이 있고 봉분 주위에도 그러한 돌을 돌렸던 듯하다. 중단의 석상은 후세에 설치한 것이며 그 뒤에는 장대석으로 얕은 1단의 석축이 있으나 이것은 석상을 놓으면서 쌓은 듯하다. 하단의 석축은 잡석으로 쌓았는데 이것도 후세에 손댄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규모의 대형 분묘여서 일반 서민의 무덤이 아님을 알 수 있으나 일성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전해지는 말로 추정할 뿐이다. 일성왕은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7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일성왕은 농토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민간에서 금·은·주옥의 사용금지를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