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황령사(상주)

황령사(상주)

2025-09-18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성주로 225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칠봉산 자락에 위치한 황령사는 절의 창건이나 연혁에 대해서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인 638년(선덕왕 7)에 의상이 창건하였고, 889년(진성왕 3)에 대구화상이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1254년(고종 41) 몽고의 장군 차라대가 상주성(백화산성)을 침공하자 황령사의 승려 홍지가 관민병을 거느리고 나가서 적의 넷째 장수를 쏘아 죽였고, 적병의 사상자가 반수 이상이나 되자 적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절이 고려 때 존재하였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령사가 함창을 중심으로 봉기한 창의진 의병의 발원지로 알려지는 등 호국의 도량으로서 그 정신을 이어온 곳이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대웅전, 천불전, 나한전, 신금당 등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후 1901년 중수되고 1928년 도허에 의해 중수되었으나 1962년 소실되었다. 현재의 신금당은 1966년에 주지 이상호에 의해 중건된 것으로 대웅전은 1976년과 1980년에 걸쳐 기와 보수와 단청을 하였다. 이는 고려 이래로 국토수호의 호국사찰로서의 높은 정신을 이어온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불상은 대세지상이 있고, 석조물로는 사찰입구에 벽허당부도는 인근 못 근처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석가 삼존불상을 모셔 두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황령사 아미타후불탱과 신중탱은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이 탱화는 조선후기 경기도 화파인 상겸파가 경북지역에 미친 영향을 연구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18세기 황령사의 사세를 짐작하는 데 있다.

화장사(대구)

화장사(대구)

2025-03-19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비슬로522길 41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 1925년 무렵 보원거사 김영옥의 발원으로 창건되었고 그가 입적한 뒤 사리 7 과가 나와 부도를 세우고, 1980년대에 지우스님이 주석하면서 중건하였다. 가람은 극락보전을 비롯해서 원통전, 칠성각, 일주문, 요사채 등이 있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여래가 극락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인 극락 회상도가 뒷벽에 탱화로 걸려 있고, 수미단은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주전각인 극락보전에 신라시대 옥불로 추정되는 작은 크기의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데 건물에 비해 불상이 작은 이유는 원래의 본전이었던 용화전에 안치하였던 불상을 중창하면서 옮겨 왔기 때문이다. 대구광역시 기념물 천내리지석묘군에 포함된 고인돌 3기가 화장사 경내에, 화장사 담에 1기가 분포하고 있어 선사시대 유적을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꽃절(화암사)

꽃절(화암사)

2025-12-02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덕로 330

음성군 원남면의 사향산 자락에 있는 사찰이다. 꽃절은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고 전해지며, 여러 고증 문헌자료와 지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1937년에 김승원이 꽃절을 청진암으로 변경하여 창건하였고, 1981년 신도회에서 청진암을 화암사로 바꾸었다. 2000년도에 화암사는 다시 원래대로 꽃절이 되었다. 이곳에는 법당과 요사채, 그리고 강당을 겸하는 관음전이 있다. 사찰에 전해지던 불상 7점 가운데 3점은 흙으로 제작한 것으로, 음성읍 한벌리 수복암으로 옮겨졌는데 1점은 부서지고 다른 2점은 봉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불상 가운데 하나인 약사여래 불상이 보관되어 있고, 법당에는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화암사(예산)

화암사(예산)

2026-08-31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1길 21-29

예산의 화암사에 가면 추사 김정희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조선후기 문인인 추사는 예산 사람으로서 이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색창연한 그의 생가, 추사고택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야트막한 오석산 아랫자락에 위치한 화암사는 추사나 그의 일가와 인연을 맺고 있는 절이다. 이 사찰을 중건한 김한신이 김정희의 증조부이기 때문이다. 김한신은 영조의 부마로서 영조 임금의 둘째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로 봉해졌는데 이들 부부는 죽은 후에 용산 아래에 위치한 앵무봉에 합장되었다. 현재의 화암사는 가까이 가 보아도 사찰 입구에 위치한 정갈한 요사채에 의해 사찰이란 느낌이 잘 들지 않는 그런 곳이다. 아주 오래된 고택의 요사채를 지나야 비로소 사찰에 들어서게 되는 데 곳곳에 추사와의 인연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이 산재해 있다.

화림선원

화림선원

2025-03-19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

화림선원은 재단법인 선학원 소속의 사찰이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 수리산(修理山) 연봉인 은룡산(隱龍山)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 속에 위치한 사찰이지만 수리산 연봉인 은용산에 의지하여 터를 닦아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100년 정도 된 흙집과 오래된 우물물이 있어 질병을 치료한다는 소문을 듣고 물을 뜨러 오는 사람들이 많으며, 1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어 이곳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절의 창건이나 연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유명한 약수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는 약수암이 있었다고만 전해져 오고 있다. 대웅전 옆에 수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는 우물이 그것이다. 절의 이름으로 삼고 있는 ‘화림(華林)’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부처가 태어난 룸비니 동산을 의미하며, 또 하나는 미륵부처가 출현하는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현재의 명칭인 화림선원은 1972년 대웅전을 건립하면서 장차 미륵부처가 출현하는 곳을 화림동산이라 부르므로 그 뜻을 새기고자 약수암에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주요한 전각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으며, 수각과 요사 두 채, 그리고 삼층석탑이 있다. 절에 전해져 오는 말에 따르면 화림선원은 원래 약수암으로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가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연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의 문헌기록에서 원래의 절 이름이라고 하는 약사사도 찾아볼 수 없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하여 「東國輿地志」, 「伽藍攷」, 「輿地圖書」 등의 문헌에는 수리산에 있던 사찰로 元堂寺와 淨水菴 두 곳만 기록되어 있다. 그나마 정수암은 18세기에는 폐사가 되어 있었다. 혹시 약수암을 정수암과 혼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절 부근을 ‘절골’이라 부르고 있다. 또 탑이 많아서 ‘탑골’이라고도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곳의 탑들을 수탈해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수원사(수원)

수원사(수원)

2025-09-19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수원천로 300 (남수동)

수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직할 사찰로 수원 및 인근 지역 불자들의 정신적 귀의처이자 메마른 도시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20년 4월 8일 당시 용주사 주지스님이셨던 대련스님이 수원지역 불자들을 위해 수원불교포교소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이래, 여러 스님들의 정진과 노력으로 전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가장 모범을 보이는 사찰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동안 대련스님 이후 임무경포교사, 손계조포교사, 정하스님, 양우스님, 법진스님, 정락스님, 자승스님, 성관스님, 세영스님께서 주지로 부임하여 수원사를 중수하고 요사를 정비했으며, 여러 신행 단체를 설립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1999년에는 연건평 1,000여 평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현대적 설비를 갖춘 불교문화원을 건립했다. 2005년 8월에는 전통 고건축과 현대식 건축기법을 이용한 연건평 200평의 공양각(요사채·식당)을 리모델링하여 수원지역 불자 및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2004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주관하는 제1회 템플처치 공연예술제 참여 사찰로, 2004년~2005년에는 나혜석 추모음악회를 통해 명실공이 문화공연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사찰로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2007년 1월 25일 성도재일 대법회날 불교문화원 지하 200여 평에 정토마을을 건립하여 지장보살님과 시왕 및 권속, 지장원불 1,800불, 지장본존 탱화 등 시왕불화 총 11점을 조성하여 낙성하였으며, 지장원불과 함께 돌아가신 영가님을 위한 안치단(사리단)도 함께 마련하여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부처님의 진리를 생활 속에서 구현하고 있다. 또한 지역사회 불교복지와 불법홍포를 위해 관내에 서호노인복지회관과 영통종합사회복지관과 영통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있다.

홍제사(밀양)

홍제사(밀양)

2025-12-17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동부동안길 4

홍제사는 조선시대 승병장인 사명대사의 표충사당과 표충비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사당 수호사찰이다. 그 연혁은 자세하지 않으나 이곳 무안에 표충비가 세워진 1742년(영조 18)에 사명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찰로 알려져 있다. 무안면은 사명대사의 출생지이기도 하며 사명대사가 창건한 백하암이 있던 곳으로, 홍제사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뒤 백하암에 세웠던 표충사의 후신이다. 백화암은 병자호란으로 그 내부에 있던 사당이 퇴락하자 1710년(숙종 36) 밀양부사 김창석이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짓고 사당을 정비하였다. 이후 표충비각의 창건주로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태허당 남붕선사가 나라로부터 표충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으면서, 현재의 터에 표충비각을 세우고 백화암에 있던 사당을 홍제사터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사당 수호사찰로 명맥을 유지다가 1838년(헌종 4)에 표충서원이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천유대사의 주도로 재약산 아래 영정사로 옮겨지면서, 비각을 독자적으로 보전하기 위한 자그마한 원당과 삼비문을 형성하여 현재의 가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비각의 관리는 표충사 승려가 번갈아 파견되어 담당하다가 일제 때에는 대처승이 허물어진 원당과 요사를 헐고 현대식 법당과 요사를 지어 포교당으로 삼고 비각을 보존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구연운 화상이 비각의 관리를 맡아 비각과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그 뒤 거의 폐허가 되어 표충비만 남게 되었다. 1977년에는 창건주 한월 동조선사가 홍제사라는 이름으로 재창건하여 국가의 지원으로 표충비각을 중수하면서 현재의 가람을 이룩하였다. 1978년에 표충비를 보호하는 보호각을 건립하고 그 주위로 담장, 삼비문과 비각을 수호하는 인법당 등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연경장엽 선사가 경충당을 건립하였고, 1981년에는 현재 요사로 쓰고 있는 인법당을 축대 아래로 내려 현재의 설법보전을 신축하였다. 1981년부터 수년간 홍제사 2대 중창주인 정상 스님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도움으로, 주법당인 설법보전과 사적비, 범종각, 경충당, 요사 등 현재 홍제사의 가람 기틀을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는 표충비각의 수호사찰로 밀양시가 추진하고 있는 사명대사 성역화작업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가의 중대사나 위기 때마다 표충비에서 땀이 흘러 '땀 흘리는 비'를 지키는 사찰로 전국에 알려져 있기도 하다.

홍룡사(양산)

홍룡사(양산)

2026-03-09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홍룡로 372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원효대사가 당나라의 승려 1천 명에게 천성산에서 화엄경을 설법할 때 낙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는데, 당시 승려들이 이 절 옆에 있는 폭포에서 몸을 씻고 원효의 설법을 들었다 하여 이름을 낙수사라고 하였다. 사찰이 있는 천성산의 산 이름은 본래 원적산이었으나, 당나라 승려 1천 명 모두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천성산[千聖山]이라고 바뀌었다고 한다. 홍룡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수백 년 동안 절터만 남아 있다가, 1910년대에 통도사 승려 법화가 중창하였고, 절 이름 홍룡은 사찰에 있는 폭포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홍룡폭포는 제1폭포와 제2폭포가 있는데, 옛날에 천룡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1970년대 말 우광이 주지로 부임한 뒤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 종각, 선방, 요사채 등이 있고, 폭포 옆에 옥당이 있다.

호압사(서울)

호압사(서울)

2026-03-11

서울특별시 금천구 호암로 278 (시흥동)

서울시 금천구의 전통사찰인 호압사는 1393년 무학대사가 창건하였다. 무학대사는 호랑이 기세를 누르기 위해 호암산에 호압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호압사에서는 현재 서울특별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호압사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고, 도량 내에 있는 500년 수량을 지닌 두 그루의 보호수는 호압사의 역사를 입증하는 자료이다. 호압사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편안한 쉼터를 마련해 주는 안식처로 오랜 세월을 품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호국지장사(서울)

2025-11-13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호국지장사는 670년 풍수지리설에 뛰어났던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도선국사는 9세기 사람이나 7세기보다는 9세기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도선국사는 이곳이 칡덩굴이 엉켜있고 약수가 나는 명당이므로 갈궁사라 했다고 전한다. 그 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갈궁사를 고혀 공민왕 때 보인스님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고쳐 화장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봉은 본말 사지(奉恩本末寺誌)』에 의하면 1577년에 선조의 생조모인 창빈 안 씨(昌嬪 安氏)의 묘를 부근으로 옮기면서 이 절을 능침 사찰로 삼고 이름을 화장사로 바꿨고, 이후 1663년에 중수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뒤 1862년에는 운담과 경해 두 스님이 중건하였다. 1870년에는 운담과 경해 두 스님이 경 파루를 새로 지었으며, 1878년에는 주지 성월스님과 경해스님이 대방 등을 수리하였다. 1896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고, 1920년에는 주지 원옹스님과 명진스님이 큰방을 수리하였으며,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 스님이 능인전을 중수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이곳에 국립묘지가 들어섰고, 1983년에는 호국지장사로 다시 사명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